토니상 시상식 장소인 맨해튼의 라디오시티 뮤직 홀 앞, 헬렌 박은 “K팝 작곡은 자신 있다. 언제든 연락 달라”며 활짝 웃었다. /이태훈 기자

부모님은 애가 탔다. 크게 한눈 판 적 없던 착한 딸. 캐나다 대학에서 프리메드(Pre-Med·의전원 준비) 과정을 밟던 딸이 2007년 연세대 교환학생으로 오더니, K팝 기획사들을 드나들며 1년여를 더 한국에 머물렀다. 지난 6월 미국 ‘공연계 오스카’ 토니상 시상식에서 아시아인 여성 최초의 작곡상 후보에 올랐던 헬렌 박(37·한국명 박현정)은 그때 갓 스물한 살이었다. 최종 수상은 불발됐지만, 그가 참여했던 브로드웨이 뮤지컬 ‘K팝(Pop)’은 미국 제작진과 한국계 창작자·배우들이 만나 완성한 작품.

“뮤지컬 작곡가를 꿈꿨지만, 미국에서 아시아인이 브로드웨이 주류에 진입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잘 알았거든요. 한국에서 싱어송라이터나 K팝 작곡가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겁도 없이 도전했던 거죠.” 한 대형 기획사에서 “작곡가 겸 보컬을 맡아 걸그룹으로 데뷔하자”는 얘기가 오갔다. 몇 달간 곡을 써서 가져가면 기획사에서 노래를 불러 영상으로 녹화하길 반복했다. 하지만 언제 데뷔한다는 기약도, 제대로 된 계약도 없었다. 스스로도 지쳐갔고, ‘우선 대학은 졸업하자’는 부모님 말을 듣기로 했다.

지난 21일 토니상 시상식 단골 개최 장소인 미국 뉴욕 맨해튼의 라디오시티 뮤직홀 근처 카페에서 만났을 때, 헬렌 박은 “그렇게 캐나다로 돌아오고 나니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뮤지컬 작곡가의 꿈이 더 커져 가더라”고 했다. 학부를 졸업한 뒤 뉴욕대 뮤지컬 작곡 대학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침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대히트하며 미국에서도 K팝에 대한 관심이 커져 가던 시기. 실험적 작품에 과감한 오프브로드웨이 극장 아르스노바가 준비하던 뮤지컬 ‘K팝’에 작곡가로 참여하게 됐다. 뮤지컬 창작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브로드웨이. 헬렌은 젊은 뮤지컬 창작자들의 꿈에 한 발 먼저 가 닿은 셈이다. “저는 늘 꿈꾸는 사람이었어요. 한국인인 걸 자랑스럽게 해 준 K팝에 부끄럽지 않게 창작자들 모두가 영혼을 담아 만들었죠.”

오프브로드웨이에서 호평받은 뒤 지난해 11월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했던 뮤지컬 ‘K팝’은 2주간 17회 공연 뒤 조기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토니상은 브로드웨이라는 그릇에 K팝의 영혼을 담은 새로운 시도를 작곡·안무·의상 등 3개 부문 후보에 올리며 높이 평가했다. “미국인들이 가진 K팝 스테레오타입에 휩쓸리지 않게 최선을 다했어요. 주인공을 맡은 걸그룹 f(x) 출신 루나씨를 소셜미디어 메시지로 직접 섭외했고, 의상과 안무 등에도 한국계 창작자들을 참여시켰죠. 다들 애틋한 마음을 가진 작품이에요.”

작년엔 토니상 후보였지만 올해는 당당히 약 50인으로 구성된 토니상 후보 추천위원회 위원이 됐다. 이젠 어엿한 브로드웨이 인사이더. 현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한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영화의 뮤지컬 음악, 또 일본에서 외국 드라마의 뮤지컬 음악 작업을 동시에 진행 중이다.

그는 “이곳에서 내가 살아온 삶에서 우러난 경험과 감정이 솔직하게 묻어나는 진실된 뮤지컬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한국계 감독이 만든 픽사 애니메이션 영화 ‘엘리멘탈’을 보면, 한국이라는 단어가 한번도 안 나오지만 자연스럽게 한국이 떠오르잖아요. 그렇게 스스로에게 솔직한 작품, 내가 가진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게 열리는 이야기를 브로드웨이에서 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