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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catastrophe)과 마주치게 된다. 질병・사고・송사・가까운 사람의 배신・결별・죽음 등…. 나중에 돌아보면 원인이 분명한 것도 있지만,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거나 불가항력적인 것들도 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았던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정신과의사 빅터 프랭클(1905~1997)은 재난보다 그 재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고 강조했다.

옛날 어른들은 특히 인생 후반기에 끼는 ‘살’(煞・사람이나 물건을 해치는 독하고 모진 기운이나 귀신의 짓)을 조심하라고 했다. 심신이 취약해지는 나이에 자칫 재기불능 상황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생 전반기 잘 살다가 후반기 닥친 어려움을 극복 못해 일찍 생을 마감하거나 폐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보아 왔다.

환갑이 넘은 지금 인생을 돌아보면 나도 몇 번의 위험한 고비가 있었다. 대개 운 좋게 넘긴 편인데 10여년전 겪은 ‘재난’은 지금 생각해봐도 아찔했다.

# 내게는 우울증으로 찾아왔다. 평소 외향적이고 비교적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뜻밖이었지만 겪어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우울증의 전형적 특징은 ‘우울한 생각의 끊임없는 반복(rumination in depression)’이다.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 뚝뚝 떨어지는 자신감, 온갖 부정적 생각들이 나를 공격했다. 불면증, 불안장애, 공황발작으로 이어졌고 평생 처음 자살을 생각했다.…

다행히 잘 극복했다. 아내 등 주변의 도움과 적절한 치료, 꼭 극복하겠다는 내 의지가 삼위일체를 이뤄 약 먹고 병원 다니는 치료는 3개월만에 끝냈다. 신체적 건강은 회복한 셈이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그러나 마음의 건강을 회복하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렸다. 마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환자처럼 부정적 생각들은 계속 나의 주위를 맴돌며 나를 시험했다. 주위사람들도 예전과 다른 나를 느꼈는지 많이 떠나갔다.

이때 나는 아예 우울증의 근원을 알아보겠다는 차원에서 기자 정신을 살려 ‘취재’하기 시작했다. 의사, 환자, 뇌과학자, 심리학자, 철학자, 종교인, 상담사, 명상가, 명리학자, 재활치료 전문가 등 수많은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이른바 ‘마음공부’를 한 것이다.

# 지금 돌이켜보면 우울증에 걸린 이유를 대략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마음이 내게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왜 쿠데타를 일으켰나. 내가 마음을 함부로 대했기 때문이다. 마음의 소리와 요구를 무시했다.

힘든다고 하는데, 꾀부리지 말라고 질책했고, 숨 좀 돌리자는 데 빨리빨리 하라고 다그쳤으며, 이 정도면 괜찮지 않느냐는 데 더 하라고 몰아쳤다. 비단 자신에게만 이렇게 대했을까. 아니다.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대했다.

결국 주인의 ‘압제’에 견디다 못한 마음이 총궐기한 것이다. 이를 신경생리학적으로 보면 자율신경계가 교란되고 오작동 돼 심신의 균형이 깨지고 멘붕과 번아웃(무정부상태)이 온 것이다.

2016년 그린란드 남동쪽 피오르 해안에서 포착된 북극곰. /NASA

#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명심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보기 싫은 대상이 있으면 안보면 그만이지만, 마음의 세계에선 그렇지 않다. 생각하지 말라면 오히려 더욱 생각나는 법이다. 심리학자들이 하는 간단한 실험이 있다.

‘눈을 감고 1분간 자유롭게 생각하라.

단 ‘흰색 북극곰’은 생각하지 말라.’

이 테스트를 하면 대부분 흰색 북극곰 모습을 여러 차례 떠올리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마음의 ‘청개구리’ 속성에 반하는 삶을 많이 살아왔다. 나쁘거나 싫다고 판단되는 생각은 부정하거나 금지・억압했다. “안돼. 그런 생각하면 못써!” 그런 속에서 각자 억압된 마음의 상처, 트라우마는 쌓여갔다.

또한 마음에는 일반 사회처럼 선・악・미・추, 온갖 것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우 고결한 생각부터 아주 저열한 욕망까지…. 그러나 만약 특정 생각·감정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들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흰색 북극곰’처럼 떠올라 두고두고 괴롭힐 것이다. 그래서 나쁜 생각이라도 막 대하면 안된다.

민주 사회의 대통령(지도자)이 온갖 집단·계층을 잘 조정하고 조화롭게 이끌어가야 하듯이 우리 각자도 ‘마음의 대통령’으로서 온갖 마음을 잘 이끌어가야 한다. 14세기 페르시아 영성(靈性) 시인 잘랄루딘 루미는 <여인숙>이란 시를 통해 이렇게 비유했다.

‘”매일 여인숙을 찾아오는 기쁨, 절망, 슬픔, 난폭자,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등 어떤 손님이든 존중하고 감사하게 맞으라….”

나도 5060 문턱에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현재 내 마음세계의 ‘대통령 수업’을 받고 있는 중이다. 결과적으로 우울증은 부족하고 미숙한 내가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는데 좋은 성찰의 기회를 주었다.

함영준 마음건강 길(mindgil.com)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