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산천동 ‘락희’의 식빵./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제빵사는 대개 말이 없다. MBTI 테스트를 한다면 백이면 백, 빵 굽는 이들은 모두 ‘I’ 즉 내향성을 상징하는 대문자가 뜰 것이다. 빵은 늘 제시간에 나와야 하고 새벽부터 준비돼야 한다. 조리법도 정확히 그램 단위로 맞춰야 한다. 그 일을 매일 똑같이 반복한다. 제빵사처럼 식빵은 지루하고 말 없는 녀석이다. 좀처럼 주목받는 일은 드물다. 그마저도 잼이나 햄과 같은 재료를 더해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식빵을 먹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의식조차 하지 못한 순간에 사람들은 두 손에 네모난 식빵을 들고 있다.

식빵을 찾아 먼저 갈 곳은 서울 대흥역 근처 ‘누아네’라는 곳이다. 검정으로 외관을 칠해 멀리서도 찾기 어렵지 않았다. 무거운 문을 밀고 들어가니 내부도 단정한 바깥만큼이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프랑스산 밀가루와 버터를 쓰는 이 집의 크루아상을 한입 베어 먹으니 바삭하게 씹히는 식감이 느껴졌다. 밀가루와 버터 반죽이 고온에서 구워지며 만들어낸 풍미는 이른 아침의 커피향 같았다. 그 뒤로 촉촉한 속과 버터의 고소한 맛이 입안 전체를 메웠다. 발로나 초콜릿을 아끼지 않고 넣은 쿠키는 늦은 밤 듣는 샹송처럼 퇴폐적이기까지 한 질감을 지녔다.

식빵은 전혀 다른 스펙트럼에 있었다. 우선 크기가 작았다. 미니 식빵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작은 크기는 분명했다. 식감은 솜사탕처럼 녹아내릴 듯 가벼웠다. 그대로 먹어도 좋지만 바삭하게 익혀 싱가포르 특산 카야잼을 바르니 더 발랄한 분위기가 났다. 날렵한 고양이 한 마리가 떠오르는 식빵 한 조각이었다.

서울 용산구 산천동 ‘락희’의 식빵.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목동으로 가면 청록색으로 외벽을 칠한 ‘리브고쉬’라는 집이 있다. 아파트 단지가 숲을 이룬 목동의 주상복합 1층, 삭막한 거리에 초록 풀이 자란 것처럼 산뜻한 기운을 주는 이 집은 내부 역시 프랑스에 온 듯한 기분을 자아냈다. 나무로 벽을 마감했고 윤이 나는 가죽 소파를 들여 커피 한 잔을 하지 않고는 밖으로 나갈 수 없을 듯싶었다. 왕관 모양을 닮은 구겔호프는 버터가 밀가루만큼 들어갔다. 버터의 짙은 풍미 속에 잔잔히 느껴지는 시트러스(감귤)류의 향기가 고급스러운 정취를 냈다. 속에 호두를 박아 넣은 ‘빵오누아’는 빵의 조밀한 질감과 침엽수림에 온 듯 밀도 있게 펼쳐지는 호두의 맛이 노부부처럼 원숙한 어울림을 이끌어냈다.

리브고쉬의 식빵은 부드럽고 촉촉한 감각의 끝에 있었다. 빵 자체의 무게감이 상당했고 단면을 만져보면 물이 묻어 나올 것처럼 수분감이 상당했다. 토스트기에 익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생으로 먹으면 마치 찹쌀떡을 먹는 것 같았다.

용산구 산천동에 가면 비탈 한구석에 ‘락희’라는 집이 있다. 찾아가기는 쉽지 않다. 차 한 대 지나기 힘든 급경사 좁은 길, 도저히 빵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이다. 빵의 종류는 작은 유리 진열장 한 줄을 채울 정도였다. 그중 크루아상, 브리오슈, 브라우니, 소금빵 등이 늘 주전 선수처럼 가운데 놓였다. 진열장 위에는 싱글 몰트 위스키 한 병이 놓여있다. 멋으로 가져다 놓은 게 아니라 크림 크루아상을 주문하면 즉석에서 그 위스키를 넣어(!) 크림을 만들어 크루아상 속에 가득 넣어줬다.

더 문제적인 빵은 바로 식빵이었다. 갑옷을 입은 기사처럼 커다란 마름모꼴에 어두운 갈색으로 구워낸 식빵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외관을 지녔다. 칼로 썰어 단면을 보면 콘크리트를 이겨놓은 듯 기포가 매우 조밀했다. 프랑스산 버터와 크림을 넣어 구운 탓인지 식빵 테두리에서 페이스트리를 씹는 듯한 맛이 났다. 우리밀만 써서 빵을 굽는다는 주인은 “우리밀을 쓰면 가격도 올라가고 굽는 데 시간도 많이 든다”며 멋쩍게 웃었다. 시간을 오래 들여 구운 빵은 천 년을 가는 주춧돌처럼 맛의 구조가 단단히 서 있었다. 계산을 치르자 그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주방에 들어갔다. 넓은 어깨에 주방이 꽉 차 보였다.

그렇게 집에는 식빵이 쌓였다. 밀가루 전분에서 단맛을 극도로 뽑아낸 하얀 식빵. 주말 오전, 혀 위에서 식빵을 살살 녹여가며 먹으면 단맛이 긴 메아리처럼 돌고 또 돌아왔다. 그 메아리에 실려 떠오르는 광경은 빵 굽는 이들의 팔뚝이었다. 용암이 터져 나온 재해 현장처럼 핏줄이 선명한 리브고쉬 주인장의 팔뚝, 나이테처럼 흉터가 또 흉터를 덮은 락희 주인장의 또 다른 팔뚝. 그 팔뚝들이 떠오르면 식빵의 맛이 숭고하게까지 느껴졌다.

#누아네: 우유식빵 4800원, 크루아상 4000원, 초콜릿쿠키 4500원. (02)712-9231

#리브고쉬: 생식빵 1만2000원, 구겔호프 7000원. (010)6834-0038

#락희: 식빵 9000원, 크루아상 3800원, 크림 크루아상 6500원. (02)713-8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