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담동 ‘라그랑자트’의 호두과자(오른쪽)와 캬트르 캬르./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아버지의 취향을 몰랐다. 아버지는 어떤 음식도 모두 먹는 남자였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 동생과 내가 먹기엔 너무 매웠던 청양고추, 남기기 아까운 밥. 이 모든 음식의 종착역은 아버지였다. 분명한 건 소주는 ‘진로’, 맥주는 ‘OB’ 정도였다. 짜장면인지 짬뽕인지, 프라이드치킨인지 양념치킨인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단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은 최근 알게 됐다. 아이스크림 한 통을 어머니와 함께 해치운다는 말을 동생에게 듣고 놀랐다. 아버지 같은 남자는 단 음식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프랑스 과자 마들렌을 사들고 갔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이거는 차랑 마시면 괜찮겠다. 좋다, 야.” 눈이 동그래지며 감상평을 내놓는 당신의 모습이 좋았다.

프랑스 과자를 찾기 위해 먼저 갈 곳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근처 ‘모멍데모시옹(Moments d’Emotions)’이다. 프랑스어로 ‘감정의 순간’이란 뜻을 지닌 이 집은 키가 크고 말끔한 중년 남성 홀로 가게를 지킨다. 좁은 가게 안에는 크루아상과 팽오쇼콜라, 브리오슈 같은 빵과 과자, 케이크가 모여 있다.

피낭시에 한 조각을 입에 넣자 과감한 버터의 풍미, 밀가루의 한계까지 밀어붙인 밀도 높은 맛이 베토벤 교향곡의 서곡처럼 전면적으로 다가왔다. 밀푀유 피스타치오는 아주 얇은 페이스트리 한 장 위에 피스타치오 크림을 올렸다. 수분을 대부분 날려 극도로 건조해진 밀푀유는 밀가루, 버터, 소금의 핵심만 남겨놓은 듯했다. 피스타치오 크림은 싱그러운 풋내와 견과류의 고소함이 유지방과 섞여 풍성한 대자연의 일면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연희동에 가면 좁은 골목길 사이 새롭게 문 연 ‘온고 파티스리’가 있다. 대부분 조도를 밝게 해 과자를 돋보이게 세팅한 다른 곳과 달리, 나무로 짠 진열대 위에 갈색 과자를 차분히 올려놓았다. 분위기는 편하지만 과자를 먹기 위해선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영업 일자는 매주 바뀌고 심지어 정오에 문을 열지만 오후 1시가 안 돼 품절이 뜨는 메뉴도 상당수다. 그중 거의 테니스공만 한 ‘슈’는 두툼하게 과자를 굽고 그 안에 슈크림을 가득 넣었다. 평소 먹던 것이 녹음이라면 이곳 슈는 라이브 콘서트였다. 슈 한입에 슈크림이 잔뜩 새어 나왔고 들숨과 날숨이 오고 갈 때마다 고급스러운 바닐라 향이 만발했다.

프랑스어로 놀이(jeu)라는 뜻의 ‘쥬’라는 이름을 단 과자들도 많다. 주인장이 놀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구웠다는 의미라고 했다. ‘두 번째 놀이’쯤 되는 ‘쥬2′는 원래 이름이 ‘바토 포레 누아르(Bateau Forêt Noir)’라는 타르트. 크림과 초콜릿을 섞은 가나슈에 주인이 직접 절인 체리와 머랭 쿠키를 올렸다. 작은 배처럼 생긴 이 과자는 프렌치키스를 연상시키는 농밀한 초콜릿과 체리, 페이스트리가 불꽃 같은 정념을 일으키며 긴장감을 유지했다.

강을 건너 강남으로 가면 청담동에 ‘라그랑자트’가 있다. 내관을 하얗게 장식한 이곳은 그만큼 단정하게 차려 입고 늘 한철 봄 같은 미소를 짓는 두 주인장이 자리를 지킨다. 이곳 역시 늑장을 부리면 틀림없이 품절이 뜨고 만다. 마음 먹고 길을 나섰다면 사전에 문의 전화를 하는 편이 낫다.

대리석 상판 위에 올려진 과자와 케이크를 보니 샤갈과 칸딘스키가 꿈꿨던 몽환과 추상의 세계를 현실에 옮긴 듯했다. 머랭쿠키와 피낭시에를 반반 섞어놓은 ‘호두과자’는 가볍고 바삭한 식감과 견과의 고소한 맛이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앙상블처럼 우아하게 교차했다. 프랑스식 파운드 케이크라고 볼 수 있는 ‘캬트르 캬르’는 촉촉하고 가벼우며 부드럽지만 묵직한 맛을 동시에 품었다.

코코넛 파우더를 곱게 입힌 ‘코코망고’, 홍차의 시작과 끝의 고운 향만 품은 ‘얼그레이’, 설탕에 절인 유자 껍질을 올리고 레몬 아이싱으로 마무리한 ‘시트롱’ 모두 테이블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잔향이 맴도는 오후, 머릿속에는 꿈, 희망, 봄, 사랑 같은 곱고 고운 단어만 맴돌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소원이라는 힘없는 두 글자만 남았다.

병상 위 아버지가 이 꿈같은 과자를 다시 맛볼 수 있기를 나는 소원했다. 아직은 아니다. 이제 겨우 아버지와 프랑스 과자 몇몇을 나눠 먹었을 뿐이다. 아직 나는 아버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모멍데모시옹: 밀푀유 피스타치오 7900원, 피낭시에 2300원. 010-9752-1902

#온고 파티스리: 슈 5600원, 쥬2 7300원. (02)332-5584

#라그랑자트: 호두과자 4500원(2개), 캬트르 캬르 4500~4900원. (02)569-55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