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숭동 대학로 '계향각'의 라즈지./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호주 멜버른 차이나타운에서 만난 중식은 내가 알던 중식이 아니었다. 영어로 적힌 메뉴판에는 짜장면, 짬뽕이 없었다. 연애편지 읽듯 메뉴판을 정독하던 중 ‘프라이드 치킨’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쓰촨(四川)식으로 닭고기를 튀겼다는 말 같았다. 과묵했던 중국인 종업원은 나를 흘깃 보더니 메뉴 이름을 작은 메모장에 적어 갔다. 잠시 후 나온 음식을 보고 흠칫 놀랐다. 우선 접시가 아닌 광주리 같은 데 음식이 담겨 있었다. 닭고기는 안 보이고 빨간 고추가 수북했다. 그 음식의 이름은 ‘라즈지(辣子鶏)’였다.

닭고기를 작게 자르고 중식도로 탁 쳐서 으깨 과자처럼 튀겨낸 뒤 빨간 고추와 화자오 같은 향신료를 같이 볶아낸 쓰촨요리 라즈지는 보기만 해도 혀에서 땀이 났다. 빨간 고추를 집을라 조심조심 잔해를 파헤쳤다. 닭은 뼈가 으깨져 있어 그대로 씹어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진흙탕 육박전을 벌이는 한국의 거친 매운맛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향긋한 여운을 남기며 이따금 폭죽을 터뜨리는 얼얼한 맛이 났다. 도저히 맥주 없이는 못 먹을 그 맛에 홀로 잔을 비웠다. 빈 잔을 보고서야 무표정했던 중국인 종업원이 웃음을 지었다.

서울 건대입구 차이나타운 끝자락에 있는 ‘봉자마라탕’은 이름 그대로 마라탕을 전문으로 한다. 메뉴판에 라즈지는 없지만 팔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메뉴에 올라 있지 않을 뿐이다. 최소 1시간 전 예약해야 먹을 수 있다. 1만원도 안 되는 마라탕은 채소와 고기가 풍성했다. 짬뽕처럼 국물이 선홍빛을 내며 빛나지는 않았다. 대신 검붉은 기름이 동동 떠 있는 게 전부였다. 입안에 국물을 넣자 종이에 베인 것처럼 날카로운 매운맛이 자비 없이 덮쳤다. 그 매운맛이 노는 바탕에는 신중하게 뽑은 육수의 뒷배가 있었다.

기다렸던 라즈지는 호주에서 봤던 것처럼 수북이 쌓인 고추 산(山)과 함께 등장했다. 잘게 토막 난 고추 사이에는 또 그만 한 크기로 튀겨낸 닭고기가 있었고 그 위로 고수를 흩뿌렸다. 수분을 거의 다 날려버린 라즈지는 붉은색을 넘어 갈색을 띠었다. 과자를 먹듯 닭고기 조각을 하나하나 입에 넣었다. 미운 여섯 살 꼬마처럼 혓바닥과 입천장을 오고 가며 맵고 뜨거운 맛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못 먹을 정도의 불쾌함이 아니라 귀여운 장난처럼 통통 튀는 맛이었다.

이태원 후미진 골목길에는 ‘장강중류’가 있다. 무협지 속 객잔처럼 나무 계단을 타고 2층에 올라가면 검은색을 중심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된 홀이 나온다. 메뉴를 보면 ‘한상차림’ 코스가 있고 몇몇 단품이 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이건 만드는 사람이건, 편애하는 메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집 주인장에게는 그 음식이 라즈지인 듯싶었다. 수북이 쌓인 고추는 폭탄을 맞은 것처럼 과격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닭고기의 여백을 채운 일종의 장식 같았다. 후추와 같이 방향성 매운맛이 톡 쏘았다. 매운맛을 뒤이어 가볍게 반짝이는 향긋한 풍미가 입안을 채웠다.

바삭한 라즈지를 열심히 씹고서 찾은 음식은 ‘토마토달걀볶음’이었다. 한국인에게 산미가 느껴지는 볶음 요리란 어렵다. 하지만 잘 달군 중식팬에서 빠르게 볶아 질퍽거리는 느낌 없이 토마토의 단맛과 신맛, 그리고 달걀의 고소한 맛을 한데 모아낸 이 음식은 그 낯섦을 지워낼 힘이 있었다.

대학로로 올라가면 ‘계향각’이 있다. 오로지 예약 손님만 받는 이 집 음식의 토대는 옛 중국 청대(淸代) 요리서인 ‘수원식단’이다. 멜버른 차이나타운 중국집처럼 낯선 이름이 메뉴판에 가득했다. 주방을 바라보면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솔개를 닮은 눈매의 사부가 자신의 몸만한 웍(wok)을 붙들고 있었다.

곁들인 채소 하나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접시를 채운 커다란 ‘동파육’은 대만 고궁박물관의 유물처럼 흐트러짐 없는 모양새였다. 젓가락으로 비계를 들면 바다가 열리듯 고기가 반으로 갈라졌다. 지방의 고소한 맛과 오래 묵은 간장의 짠맛이 빽빽한 송림(松林) 속에 들어간 듯 높은 밀도의 맛을 만들었다.

‘다진홍고추생선찜’은 손으로 다진 청양고추에 소금과 술, 마늘 등을 넣고 1년 이상 숙성시킨 양념장을 찐 우럭 위에 가득 올려냈다. 담백한 생선살은 흰 캔버스가 되어 고흐의 그림처럼 빨갛게 타오르는 색과 맛을 깊숙이 품었다.

기름기를 말끔하게 뺀 라즈지는 화려한 다른 요리들에 비해 평범해 보였지만, 그 속에 깃든 찰나의 기술은 높게 우러러봐야 할 경지였다. 과하지 않게 정확히 튀긴 닭 껍질은 살얼음이 깨지듯 청량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파와 건고추, 마늘, 화자오가 어우러진 풍미는 멀리서도 그 기척을 느낄 수 있는 고수의 아우라가 베어 있었다. 큰 칼은 쓰임을 가리지 않았고, 초로의 사부는 모든 음식에 자신의 역사를 심었다. 남은 것은 웃음이고 기쁨이었다. 해탈한 듯 작은 닭고기 하나에 행복할 수 있는 찰나였다.

#봉자마라탕: 마라탕 7000원, 라즈지 3만5000원. (02)499-8889

#장강중류: 라즈지 3만8000원, 토마토달걀볶음 2만6000원. 010-6727-0329

#계향각: 동파육 8만8000원, 다진홍고추생선찜 11만9000원, 라즈지 3만5000원. (02)3674-7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