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남동 '제이엘 디저트바'의 티라미수(앞)와 젤라토 케이크./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불을 다루는 요리와 오븐 속에서 완성되는 제과·제빵은 엄연히 다른 장르다. 요리는 이글거리는 불처럼 즉흥적이고 감각적이다. 반면 제과·제빵은 엄격한 계량과 정밀한 계산으로 이뤄진 공학의 세상이다.

현대와 같은 케이크는 산업 혁명과 함께 탄생했다. 나무와 석탄이 아닌 가스불을 쓰기 시작하면서 불과 온도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대량으로 케이크를 굽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사이 결혼식이나 생일에 케이크를 먹던 독일의 풍습은 전 세계로 퍼졌다. 이제 으레 기념일이 되면 케이크를 준비하고 초를 끈다. 건조하게 케이크의 역사를 훑다 보면 ‘굳이 왜 남의 풍습을 따라야 하나’ 같은 반항심이 불끈거린다. 그러다 창문 밖으로 쌓인 눈을 본다. 문득 올 한 해 자주 보지도 못한 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든다. 케이크라도 선물할까?

서울 신사동 뒷골목에 웅크린 고양이처럼 작게 자리한 ‘쇼토’는 케이크 전문점이다. 몇 가지 구움 과자도 판매하지만 진열장에서 빛나는 케이크가 주인공이다. 케이크 중에서도 이 집 이름처럼 쇼트 케이크를 전문으로 한다. 쇼트 케이크는 작게 자른 케이크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말차, 초콜릿 등 여러 재료로 케이크를 만들지만 그중에서도 딸기로 만든 케이크가 가장 빛난다.

프랑스에서 ‘프레지에(fraisier)’라고 부르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는 가장 흔한 케이크 중 하나다. 하지만 그만큼 평가절하 된 면이 없지 않다. 이 집의 케이크는 단맛이 강하지 않았다. 대신 은근히 스며드는 온화한 단맛이 미소를 짓듯 구석구석 깃들어 있었다. 진열장에 앉은 케이크들은 잡지 속 사진처럼 모양이 한결 같았고 단면에 드러난 딸기의 붉은색은 선명했다. 입에서 녹아 내리는 촉촉한 식감에는 어떤 저항감도 없었다.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처럼 부드럽게 사라지는 케이크는 투명한 수채화 같기도 했다. 그 바탕에는 반복된 수련으로 얻은 섬세하고 오차 없는 공법이 있었다.

한남동에 있는 ‘오지힐’은 일본풍에 가까운 ‘쇼토’와 달리 이름대로 호주 스타일 케이크를 낸다. 아이싱을 많이 올려 모양이 화려하지만 어딘지 투박한 영국 케이크 전통을 따른다. 이 집에 들어섰을 때 홀 가운데 큰 테이블에 가득 올려놓은 케이크에 먼저 눈이 갔다. 그림 형제의 ‘헨젤과 그레텔’ 속 과자집에 온 것처럼 풍성히 쌓인 케이크를 보니 먹기 전에도 혈당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에그타르트, 치즈케이크, 바나나푸딩, 브라우니, 레몬케이크 등 기억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케이크가 이 집에 있었다. 그 중 크림치즈를 쓰고 계피와 같은 향신료, 당근이 듬뿍 들어간 당근 케이크가 인기 높았다. 모양만 보면 정교한 맛이 떨어졌다. 그러나 입에 넣으니 그 또한 계획이었나 싶었다. 입에 케이크가 가득 찰 때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아껴 먹을 필요도, 모양이 흐트러질까 조심스러울 필요도 없었다. 적을 물리치듯 포크를 케이크 한가운데 푹 박아 가득 떠서 입에 넣었다. 풍요로운 호주 땅의 구김살 없는 행복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한강진역 쪽으로 자리를 옮기면 언덕길 2층에 ‘제이엘디저트바’가 있다. 쇼토가 정제된 맛과 멋을, 오지힐이 자유분방한 느낌을 강조한다면 이곳은 창의적이고 때로는 전위적인 디저트를 맛볼 수 있다.

미리 주문을 넣어야 받아볼 수 있는 ‘젤라토 케이크’는 일종의 아이스크림 케이크다. 젤라토는 일반적인 아이스크림에 비해 입자가 조밀하고 유지방과 공기 함유량이 낮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맛이 조밀하게 느껴지며 혀에서 녹는 감촉도 세련됐다. 아기자기한 장식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케이크의 밑부분은 생동하는 풋내와 고소한 맛을 내는 피스타치오 젤라토가, 그 위로는 장미, 산딸기, 리치를 조합하여 맛을 낸 연분홍색 젤라토 2개로 이뤄졌다. 샤갈의 그림처럼 몽환적으로 다가오는 맛은 서늘한 온도감에 얹혀져 매끈하고 우아하게 끝났다. 산뜻하고 단맛이 적어 무거운 식사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또 다른 대표 메뉴는 ‘티라미수’다. 밑에는 마르살라 와인과 럼주, 커피를 듬뿍 적신 케이크를 깔고 위에는 마스카포네 치즈 100%에 달걀 노른자를 섞어 만든 뻑뻑한 밀도의 크림을 올렸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코코아 파우더 대신 직접 갈아 뿌린 초콜릿이었다. 숟가락을 들어 케이크를 작게 퍼 올렸다. 견고하고 밝은 단맛이 커피와 술의 감미롭고 무거운 맛을 만나 빛과 어두움을 대비시킨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극적인 효과를 냈다. 이글거리는 힘을 지닌 케이크였다. 달콤쌉싸름한 케이크 한 조각에 차가운 겨울 밤이 서서히 달아 올랐다.

#쇼토: 딸기 쇼토 9500원(변동), 초코바나나쇼토 8200원

#오지힐: 파블로바 7500원, 당근 케이크 7500원

#제이엘디저트바: 티라미수 9500원, 젤라토 케이크 6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