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인의 갑작스러운 부고에 문단 및 문화계 인사들은 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들에게 김지하는 촛불이었고, 민족 예술 1세대의 대선배였으며, 한편으로 인간 생명을 재해석한 시인이자 철학자였다. 시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문화계 인사 4인의 육성(肉聲)을 싣는다.

●이문열(소설가)

젊은 시절 내 소설 ‘황제를 위하여’를 읽고서 보자고 해 만났다. 그때 난초 한 포기를 그려준 것이 첫 만남이었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자꾸 나보고 내가 죽기를 바라는가보다, 왜 죽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거 같다”면서 그는 괴로워했다. ‘한때 헹가래를 받으며 솟구쳤다가 다시 떨어져 냉담한 대접을 받는 사람 기분이 이렇겠구나’ 생각했다. 2005년 독일에서 만났을 때 여러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게 마지막이다. 쓸쓸하고 슬프다.

●김훈(소설가)

암흑시대에 촛불 하나가 살아서 감옥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솔 출판사 김지하 전집에 연보가 자세히 나와 있다. 김지하가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무진기행’의 김승옥 선생이 “나는 김지하와 서울대를 같이 나왔는데 이 사람은 빨갱이 아니다”라고 증언을 했다. 김승옥 선생, 선우휘 선생이 그분을 위해 탄원서를 참 많이 썼다. 말년에는 내면에 너무 몰두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후배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많이 했다.

●유홍준(전 문화재청장)

시인, 민주화 운동 투사로서의 업적도 크지만 ‘민족 민중 예술 1세대의 대부’로서 우리 문화사에 큰 업적을 남긴 분이다. 1960년대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을 중심으로 민족 예술을 이끌 후배들을 길렀다. 당시 교유한 이애주, 임진택, 김민기, 오윤, 김영동 등 소위 ‘김지하 사단’이 춤, 연극, 미술, 국악 등 각 예술 분야에서 김지하 미학의 각론을 폈다.

●정과리(문학평론가)

저항 반독재투쟁 선봉에 섰던 분이다. 투쟁의 방식을 시를 통해 했고, 시가 바로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분이다. 동시에 후배들에게는 천진하면서 허심탄회했고, 달변이었다. 말년에는 적막하고 외로운 심상이 시에 그대로 드러났다. ‘민족시인’으로 축소되기엔 생명주의라는 강한 선이 그분의 시에 있었다. 그걸 온전히 밝혀 재평가하는 것이 한국 시문학의 중요한 관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