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代役)과 주역(主役)은 글자 한 자 차이. 하지만 때로는 성악가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미국 ‘오페라 1번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메트)에 출연 대기 중이던 소프라노 박소영(37)씨가 그런 경우였다. 음악계에서 흔히 ‘커버(cover)’라고 하는 대역은 주인공 역을 맡은 성악가들이 건강 이상으로 출연이 어려울 경우 곧바로 투입되는 가수를 뜻한다. 스타 탄생의 등용문으로도 통한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무대에 5년 만에 선 소프라노 박소영씨. /고운호 기자

프랑스 작곡가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여주인공 줄리엣의 대역을 맡은 박씨는 공연 시작 불과 2시간 20분 전에 극장 측의 긴급 연락을 받았다. “무대에 서기로 했던 미국 소프라노가 건강을 이유로 출연을 취소했으니 무대에 서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는 귀국 직후인 2일 인터뷰에서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려고 전날 짐까지 싸 놓았는데 다시 풀고서 옷 갈아입고 곧바로 극장으로 달려갔다”며 웃었다. 메트 음악 감독인 야닉 네제 세겡의 지휘로 그날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그는 “실은 4막에서 상대 남자 가수와 사랑의 이중창을 부르다가 살짝 얼굴이 부딪히는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웃음을 참고 계속 노래했다”고 했다. 2019년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가운데 밤의 여왕으로 메트에 데뷔한 뒤 5년 만의 복귀 무대였다.

서울대 음대와 미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졸업한 박씨는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 휴스턴 오페라극장에서 잇따라 노래했다. 2019년 메트 무대를 처음으로 밟으면서 꿈을 이루는 듯했지만, 이듬해 코로나 사태로 2년간 공연이 대부분 취소되고 말았다. 성악가로서 활짝 나래를 펼 무렵에 다시 꺾이는 좌절을 경험한 것이다. 그는 “2020년 코로나 사태가 시작될 무렵 메트 오페라 출연을 불과 3시간 앞두고서 공연 취소 통보를 받았다. 그때는 ‘지독히 운 없는 성악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 기간 프랑스 오페라처럼 낯선 작품과 배역들을 새롭게 공부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2022년 서울시오페라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역을 맡은 그의 영상을 본 메트 측에서 다시 출연 제안을 했다. 오는 11일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에서 전주시향(지휘 성기선)과 말러 교향곡 4번을 협연할 예정이며, 앞으로도 메트 등 미국 오페라 극장들과 차기작 출연을 논의 중이다. 그는 “주역이든 대역이든, 큰 무대든 작은 무대든, 오페라든 가곡이든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언제 어디서든 성악가로서 노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