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컬렉션의 메인 공간인 로툰다에 설치된 김수자 '호흡' 전시 전경. 바닥을 418개 거울로 뒤덮었다. /부르스 드 코메르스 피노 컬렉션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둥근 유리 돔 천장이 바닥을 뒤덮은 거울에 반사돼 발밑으로 펼쳐졌다. 프랑스 파리의 유서 깊은 건물이 억만장자의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곳에서, ‘보따리 작가’ 김수자(67)가 하늘과 바닥이 전복된 무한의 공간을 창조했다.

파리 중심가 1구에 자리 잡은 부르스 드 코메르스(Bourse de Commerce·상공회의소)-피노컬렉션. 요즘 전 세계 미술 관계자와 컬렉터를 불러모으고 있는 가장 핫한 현대미술관이다. 구찌, 보테가 베네타, 발렌시아가 등 명품 브랜드를 소유한 케링 그룹의 창업주이자 미술품 경매 회사 크리스티의 소유주이며 미술품 1만여 점을 소장한 수퍼 컬렉터 프랑수아 피노(88)가 건립했다. 18세기 곡물 보관소로 지어진 건물을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리모델링해 2021년 5월 문을 열었다.

프랑스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컬렉션의 메인 공간인 로툰다에 설치된 김수자 '호흡' 전시 전경. 바닥을 418개 거울로 뒤덮었다. 천장 돔과 19세기 프레스코화, 안도 다다오의 노출 콘크리트까지 바닥 거울에 반사돼 환상적 풍경을 빚어낸다. /부르스 드 코메르스 피노 컬렉션
프랑스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컬렉션의 메인 공간인 로툰다에 설치된 김수자 '호흡' 전시. 바닥을 418개 거울로 뒤덮어 천장 돔이 반사돼 보인다. /부르스 드 코메르스 피노 컬렉션

피노컬렉션이 새 전시를 개최하면서 미술관의 대표 공간을 김수자에게 내줬다. 20일(현지 시각) 개막한 기획전 ‘흐르는 대로의 세상’은 제프 쿤스, 신디 셔먼, 마우리치오 카텔란 등 세계 블루칩 작가 29팀의 작품 50여 점을 한데 모은 자리. 김수자는 ‘카르트 블랑슈’(전권 위임) 작가로 초대받아 미술관 상징인 로툰다(원형 홀)를 비롯해 24개의 쇼케이스, 지하 공간까지 총 44점을 ‘호흡-별자리’라는 제목으로 선보인다. ‘백지수표’라는 뜻의 카르트 블랑슈는 작가에게 전시 기획부터 실현까지 전권을 맡기는 프로젝트. 대형 기획전 안에서 한 작가가 메인 공간을 독점하고 직접 기획해 개인전을 여는 독특한 형식의 전시다.

설치미술가 김수자

압권은 로마 판테온에서 영감을 얻어 세웠다는 로툰다의 전복이다. 지름 29m 원형 돔 바닥을 418개의 거울로 뒤덮었다. 천장에 가득한 19세기 프레스코화, 안도 다다오의 노출 콘크리트까지 뒤집힌 채 바닥에 투영되면서 환상적 풍경을 빚어낸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지난해 9월 제안을 받고 완벽하고 장엄한 이 돔을 보자마자 거울로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관람객들은 공중에 부양한 듯한 공간에서 마치 하늘을 걷는 듯 조심스레 거울 바닥을 내딛는다. 작가는 “관객도 일종의 퍼포머(공연자)가 된다”면서 “이 곳에 들어온 관객이 거울을 보면서 공간과 관객이 만나고, 거울이 비추는 가상의 몸과 실제 관객의 몸이 만나면서 일어나는 대화, 이런 모든 것들이 그동안 해 왔던 바느질 작업 개념의 연장선에 있다. 거울은 펼쳐진 바늘”이라고 했다.

프랑스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컬렉션의 메인 공간인 로툰다에 설치된 김수자 '호흡' 전시. 관객들이 바닥이 거울로 뒤덮인 공간에 서 있다. /부르스 드 코메르스 피노 컬렉션

‘보따리 작가’는 그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1980년대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고민하던 중 어머니와 함께 이불보를 꿰매던 행위에서 영감을 얻었다. 바늘이 천에 닿는 순간 우주와 자신이 연결되는 듯한 경험을 한 그는 이후 바느질로 보따리를 꿰맸다. 1997년 색동 보따리를 가득 실은 트럭에 앉아 11일 동안 이동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며 이름을 알렸다. 그는 “이번 작업도 원형 구조물을 하나의 건축적 보따리로 봤다”며 “두 반구를 붙여 달항아리를 만들듯이 실재와 가상의 두 공간이 맞붙어서 하나의 원형 세계를 만든 것”이라고 했다.

피노켈렉션 미술관을 설립한 피노 회장은 “역사적인 공간을 이해하고 재해석하는 김수자 작가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로툰다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뒤집기 위해 거울을 사용하자는 작가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고, 무한한 깊이를 지닌 공간 배치 속에서 관객이 주체가 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도 좋았다”고 말했다.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 피노컬렉션에서 열리는 김수자 대규모 개인전 '호흡-별자리' 중 24개 쇼케이스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

로툰다를 원형으로 빙 둘러싼 24개 쇼케이스도 모두 김수자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흰색 달항아리부터 작가가 쓰던 요가 매트, 지인이 세상을 떠난 후 생전 사용한 물건들을 싸맨 하얀 보따리, 작가의 팔을 캐스팅한 조각까지 진열장에 하나씩 놓였다. 지하 공간에서는 그의 대표 퍼포먼스 영상 작품 ‘바늘 여인’과 16㎜ 필름 영상 연작 ‘실의 궤적’ 여섯 편 전편이 상영된다. 40년간 축적한 김수자의 작품 세계가 마치 회고전처럼 파리 한복판에서 드넓게 펼쳐졌다.

작가에게도 이번 전시는 각별한 의미다. 그는 “24개 쇼케이스에 각각 어떤 작품을, 어떤 배치로 진열할지 오랫동안 고심했다”며 “제가 다각적인 의미에서 던져오던 삶과 죽음 또는 삶과 예술에 대한 질문을 이곳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중요한 건 제가 색(色)과 무색(無色)을 구별했다는 겁니다. 작가로서 지금 저는 어떤 ‘무색의 단계’에 들어가 있어요. 과거 작업인 지하 공간에 색색의 보자기가 놓여있는 반면, 1층에선 색이 거의 없다는 걸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언젠가는 다시 색이 있는 작업으로 돌아오겠지만.”

프랑스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 피노컬렉션에서 20일 개막한 기획전 '흐르는 대로의 세상' 언론 공개 행사에서 김수자 작가가 참석한 기자들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뉴스1

이날 개막식에는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 베르나르 블리스텐 전 퐁피두센터 관장, 건축가 장 누벨, 끌레흐 베르나디 오랑주리 미술관장, 타냐 엘스트헤이스트 네덜란드 라켄할시립미술관장 등 유럽 문화계 인사들이 총출동했다. 전시는 9월 2일까지. 입장료 성인 14유로.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 피노컬렉션 지하 공간에 설치된 김수자 영상 '실의 궤적 - 챕터 I'을 관람하는 관객 모습. /부르스 드 코메르스 피노컬렉션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컬렉션

프랑수아 피노 케링 그룹 회장이 50년간 수집한 1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1763년 곡물 보관소로 지어져 1889년 상품 거래소로, 미술관 개관 전까지는 상공회의소와 증권거래소로 활용된 유서 깊은 건물이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3년간 리모델링해 2021년 5월 개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