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 '군상'(1986). 한지에 먹. /이응노미술관

조선 시대 선비들이 전국 각지 유배지에서 문예를 꽃피웠다면, 근대기로 오면서 그 유배지의 역할을 감옥이 대신했다. 일제 강점기와 독재정권 하에서 수많은 한국의 문인과 화가는 감옥살이를 했고, 출소해서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게 감옥은 학교였다.”

이응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190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5세에 가출하여 한국화를 배웠고, 일본에 가서 신문배달소를 운영하며 고학으로 일본화와 유화도 섭렵했다. 1958년 54세 나이로 과감하게 파리에 진출, 성공한 화가가 됐다. 파리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했으며, 당대 프랑스 일급 평론가들의 찬사를 얻었다. 독일에 성공한 작곡가 윤이상이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화가 이응노가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이들은 나란히 동백림사건에 연루됐다. 1967년 이응노는 한국 정부의 초청 편지를 받고 금의환향하는 줄 알고 입국했다가 공항에서 바로 붙잡혀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2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그는 오히려 인간을 집중 탐구할 시간을 가졌고, 그의 대표작인 인간 연작을 시작했다. 재료가 없으니 수감자에게 제공되는 밥을 덜 먹고, 밥풀을 신문지에 이겨 군상 조각을 제작하기도 했다.

출옥 후에는 파리에서 인간 연작을 이어갔다. 처음엔 작품에 적은 인원이 등장하고, 춤추는 모습에 가까웠다가, 점차 그 수가 많아져 수백 수천 명이 거대한 종이 위에서 장대한 움직임을 형성했다. 특히 1980년 5·18 광주항쟁 소식을 파리에서 접했을 때는 저항하고 분노하는 수많은 군중의 모습을 폭발적으로 그렸다. 그의 그림 속 인간은 각기 다른 동작과 속도로 움직인다. 하지만 모두 힘을 합쳐 한 방향을 향해 질주하기도 하고, 다 함께 신명 나게 춤을 추기도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저 개미 떼같이 미미해 보일지 몰라도, 인간은 작지만 마땅한 각자의 몫을 해내며, 모두 연결된 채 세상을 함께 헤쳐 나가는 존재들이다!

1989년 개방 국면에 접어들어 이응노도 드디어 한국에 올 수 있지 않나 싶을 때, 그는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국에선 외면당한 화가였지만, 프랑스 정부는 그를 예우하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했다. 그 후 작품만은 화가가 그토록 원하던 고국으로 돌아왔고, 그중 한 점이 지금 소마미술관에 걸렸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작품 보려면…

▲서울 소마미술관 8월 27일까지

▲입장료: 성인 1만5000원, 학생 9000원

▲문의: (02)724-6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