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아이맥스(IMAX) 대형 화면 상영을 시작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본 관객들이 기념품을 받기 위해 오전부터 줄지어 섰다. /이태경 기자

지난 4일 저녁 서울 CGV용산아이파크몰 매표소 앞. 평소라면 한산한 평일 저녁이지만 이날만큼은 100여 명 가까운 관객들이 길게 줄지어 있었다. 올해 관객 445만명을 동원하며 선풍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기념품(굿즈)을 받기 위한 줄이었다.

이날 극장 측에서는 아이맥스(IMAX) 대형 화면 개봉에 맞춰서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응원 문구인 ‘일의전심(一意專心·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쏟음)’ 등이 적힌 스티커를 관객들에게 나눠줬다. 10~20대 젊은 관객들이 70% 이상이었다. 실제 농구팀을 응원하듯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북산고 유니폼을 맞춰 입은 관객들도 있었다. 광주광역시에서 올라온 대학생 서모(23)씨는 “처음엔 원작 만화를 모르고 봤고, 두 번째는 만화를 본 뒤 다시 봤고, 한국어 더빙판으로 보고, 이번엔 아이맥스로 보면서 벌써 6번째 관람”이라며 웃었다. 13번이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관람한 대학생 우지민(23)씨는 “대사도 거의 외울 정도다.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영감님(감독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죠? 난 바로 지금이라고요!’라는 강백호의 말”이라고 했다.

올해 극장가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돌풍이 멈출 줄 모른다 영화진흥위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올해 극장을 찾은 전체 관객은 2600만명. 이 가운데 ‘더 퍼스트 슬램덩크’(445만명), ‘스즈메의 문단속’(386만명)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53만명) 등 세 편의 관객이 884만명(34%)에 이른다. 쉽게 말해 올해 극장을 찾은 관객 3명 가운데 1명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관람했다는 뜻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은 올해 전체 극장 흥행 순위에서도 한미(韓美) 영화들을 제치고 나란히 1~2위에 올랐다.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국내 흥행 순위

한국 극장가의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일본 애니메이션) 돌풍은 상반기 내내 꺾이지 않을 전망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여세를 몰아서 5일부터 아이맥스 상영을 시작했다. ‘스즈메의 문단속’도 다음 달 한국어 더빙판 개봉을 준비 중이다. 올해 흥행 1~2위인 일본 애니메이션의 자체 경쟁이 계속되는 셈이다. 두 편의 삽입곡도 더불어 인기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제가를 부른 일본 록 그룹 ‘텐피트(10-Feet)’의 내한 행사가 5일 서울 용산에서 열렸다.

영화 전문가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돌풍의 이유로 크게 4가지를 꼽는다. 우선 K팝과 영화·드라마·웹툰 등 한국 콘텐츠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본이 결정적 비교 우위를 지닌 분야가 애니메이션이다. 영화평론가 정지욱씨는 “한국 애니메이션이 아동물에 편중되어 있다면, 일본 애니메이션은 공포·로봇·괴수물 같은 장르물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와 신카이 마코토 같은 거장들의 장편까지 산업적·장르적 다양성이 강점”이라고 말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협회가 집계한 2021년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 규모는 2조7422억엔(약 27조원)에 이른다.

또 코로나 사태 이후에도 극장 침체가 계속되면서 한국 영화의 ‘1000만 관객’이 실종된 가운데, 강력한 팬덤을 지닌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상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영화평론가 윤성은씨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초기에 원작 만화를 기억하는 40~50대 남성 관객들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키다가 자녀 세대인 10~20대로 점차 확산됐다. 반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전작 ‘너의 이름은’을 기억하는 20~30대 여성 관객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작품을 반복 관람하는 ‘N차 관람’ 역시 두드러진 현상이다. 복합상영관 CGV에 따르면 티켓 판매량 기준으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24.2%, ‘스즈메의 문단속’은 16%가 같은 작품을 반복 관람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더 퍼스트 슬램덩크’)이나 재난 이후의 위로(‘스즈메의 문단속’)처럼 보편적 공감대를 지닌 주제도 인기의 원인이다. 김성일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수석 프로그래머는 “스포츠의 치열한 승부 근성을 묘사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나 동일본 대지진 참사를 겪은 일본인들에게 따스한 위안을 전하는 ‘스즈메의 문단속’은 언어와 국경을 뛰어넘는 공감대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두 애니메이션은 하나의 소재를 다른 장르에 적용시켜서 시장의 파급력을 높이는 ‘원 소스 멀티유스(one source multi-use)’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1990~1996년 연재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1억7000만 부의 판매고를 기록한 만화 ‘슬램덩크’가 대표적이다. 만화·TV 애니메이션·극장판으로 계속 나오면서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스즈메의 문단속’ 역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소설이 교보문고 소설 분야 1위, 전체 5위에 올랐다. 나리카와 아야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한일 양국 사이의 정치적 긴장감과는 별개로 관광·문화 분야에서는 공감대와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는 방증(傍證)”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