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육왕' 한국어판을 펴낸 일본 소설가 이케이도 준. /Kouda Toshimitsu

일본 소설가 이케이도 준(池井戸潤)은 “달리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육상 소설을 썼고, 쓰고 있다. 유명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에 대학 역전마라톤을 소재로 ‘우리들의 하코네 역전(俺たちの箱根駅伝)’을 연재하고 있고, 러닝화 제작에 뛰어든 다비(일본식 버선) 업체의 분투를 그린 ‘육왕(陸王)’은 일본에서 누적 60만부 이상 판매됐다.

최근 ‘육왕’ 한국판을 출간한 그는 본지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달리지도 않으면서 이런 소설을 쓰는 것은 분명 무슨 인연이 있어서일 것”이라고 했다. ‘육왕’은 달리기 좋아하는 편집자의 발가락 운동화가 다비와 비슷하게 보인다는 점에 착안해 구상했다고 한다. 다섯 발가락이 떨어져 있어 맨발 감각으로 달릴 수 있다는 신발이 지면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지는 다비와 비슷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케이도의 베스트셀러 ‘한자와 나오키’나 ‘변두리 로켓’처럼 ‘육왕’ 역시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그린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처럼, 기울어가는 영세 다비업체 고하제야는 마지막 불꽃을 사르듯 ‘러닝용 다비’ 개발에 성공하고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아틀란티스를 상대로 승리한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스토리인데도 600페이지 넘는 책이 단숨에 읽힌다.

단순한 플롯을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다양하고 생생한 인물들. 예컨대 도전자 입장인 고하제야에도 신사업 진출에 반대하는 재무 담당자가 있고, 자금력만을 앞세우는 아틀란티스에도 장인 정신을 갖추고 후원 선수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슈피터(육상 선수들을 위해 맞춤 신발을 설계하는 사람)가 있다. 이케이도는 “플롯보다 인물이 우선”이라면서 “인물은 작가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각자의 생각이나 사정에 따라 움직이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고 했다. 은행원 출신 작가답게 기업과 금융기관 사이의 협력과 갈등, 기업 간 인수합병(M&A) 같은 장치를 활용해 이야기를 풍부하게 한다는 점에서 경제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이케이도 작품의 인물이나 기업은 종종 ‘실존 모델설’이 제기됐다. 지난 2020년 일본 미쓰비시은행 행장으로 파격 발탁된 한자와 준이치 상무가 대표작 ‘한자와 나오키’의 실제 모델이라는 설이 퍼진 게 대표적인 사례. 이케이도는 ‘육왕’에 대해서도 “비슷한 상황의 회사가 있었고 자신이 모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모두 (실제 모델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마라톤 다비’는 실제로 있었던 물건이다. 카나쿠리 시조(金栗四三)가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마라톤에 다비 형태의 얇고 가벼운 신발을 신고 출전했다. 오사카 명물 ‘글리코 맨’ 간판의 모델로도 알려져 있는 카나쿠리는 일본 마라톤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 스톡홀름에서 그는 레이스 도중 일사병으로 탈진해 근처 농가에서 치료를 받다가 ‘경기 중 행방불명’으로 처리됐다. 1967년 스웨덴에서 그를 다시 초청해 레이스를 끝마치는 이벤트를 열었고, 카나쿠리의 기록은 ‘54년 8개월 6일 5시간 32분 20.3초’로 발표됐다. 공식 기록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도 ‘가장 느린 마라톤 기록’으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