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뮤직 코리아

쇼팽 콩쿠르 우승자라고 하면 눈코 뜰 새 없이 숨가쁜 일정을 치를 것이라고만 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폴란드 피아니스트 라파우 블레하츠(38)는 지난 2016년 전혀 다른 결정을 내렸다. 한 해 일정을 모두 비우고 고국 토룬의 코페르니쿠스대(大)에서 철학 박사 논문을 쓰기로 한 것이다. 2005년 대회 우승자인 그는 조성진의 ‘콩쿠르 10년 선배’다.

블레하츠는 최근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고교 시절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아서 플라톤의 ‘대화 편’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즐겨 읽었는데, 철학 공부가 음악 해석의 자유와 한계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고 말했다. 그는 22일 예술의전당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33)와 펼치는 이중주 무대를 앞두고 있다.

당시 그가 선택한 논문 주제는 현상학(現象學). 인간 인식의 구조에 대한 탐구로 20세기 철학사에서도 중요한 사조로 꼽힌다. 블레하츠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콘서트 같은 음악적 경험에도 미학적·형이상학적 관점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고 말했다.

창설자인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은 물론, 제자인 폴란드 철학자 로만 인가르덴(1893~1970)의 책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블레하츠는 “현상학은 예술적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준다. 철학 공부 덕분에 무대에서 내가 빚어내는 감정과 관객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지도 깨닫게 됐다”고 했다. 더 좋은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철학 박사’ 블레하츠라고 불러도 되느냐고 묻자, 그는 “그 호칭이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그냥 ‘라파우 블레하츠’라 불러달라”며 웃었다.

안식년 덕분에 가능했던 음악적 발견이 또 하나 있었다. 2016년 고국 폴란드에서 열린 비에냐프스키 콩쿠르를 보다가 대회 2위에 입상한 김봄소리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은 것. 그는 “마법 같은 음악적 분위기와 다채로운 색채를 빚어내는 김봄소리의 능력과 이해력에 매료됐다”고 했다.

당시 블레하츠는 ‘제 이름은 블레하츠이고 피아니스트입니다’로 시작하는 이메일을 김봄소리에게 보냈다. 예전 인터뷰에서 김봄소리는 “처음엔 ‘가짜 메일’인 줄만 알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렇게 시작된 이들의 협업은 2019년 드뷔시와 포레, 폴란드 작곡가 시마노프스키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담은 음반 녹음으로 이어졌다. 22일 예술의전당에서도 시마노프스키의 곡을 들려준다. 블레하츠는 “앞으로도 새로운 곡들을 봄소리와 함께 연주하고 녹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