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오디션 ‘내일은 미스터트롯’ 7회 차가 방송된 2020년 2월 13일, 무대에 오른 소년 트로트 가수 정동원이 선택한 노래는 ‘희망가’였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희망가’가 언제 탄생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청년 경계가’ ‘탕자 자탄가’ ‘이 풍진 세월(세상)’등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3년, 가수 박채선과 이류색이 음반에 담아 내놓으며 ‘최초의 대중가요’(국가기록원)로 기록됐다. ‘우리나라 사람이 창작에 간여한 유행 창가로 음반에 수록된 최초의 노래’(한국민족문화대백과)이자 한국 트로트의 시작이었다. 트로트는 미국 춤곡 폭스트로트 박자와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으며 시작됐지만, 이후 한국 고유의 음악 장르로 자리 잡았다. ‘희망가(이 풍진 세월)’에서 출발해 EDM(Electronic Dance Music) 트로트로 불리는 ‘아모르 파티’까지 발전을 거듭하며 사랑받아 온 트로트가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올해로 트로트 100주년 맞아

‘이 풍진 세월’은 3·1 만세 운동 이후 지향 없이 방황하던 식민지 청년들에게 허무주의에 빠지지 말 것을 권하는 노래였다. ‘반공중(半空中)에 둥근 달 아래 갈 길 모르는 저 청년’에게 ‘담소화답(談笑和答)에 엄벙덤벙’ 하지도, ‘주색잡기에 침범’하지도 말라고 타이른다. 이애리수의 ‘황성옛터’는 1932년 음반으로 나왔지만 처음 불린 것은 5년 전인 1927년 극장 단성사의 막간 무대에서였다. 나라 잃은 설움을 폐허가 된 고려 궁궐터에 빗대 불러 식민지 조선인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이애리수는 ‘민족의 연인’이란 별명을 얻었다. 걸출한 트로트 가수 이난영은 조선일보가 1934년 주최한 ‘향토 노래가사 공모전’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민족 고유의 정서를 노래로 되살리자는 호소가 큰 호응을 불러일으켜 수많은 응모작이 몰렸다. 그 가운데 문일석이 작사한 ‘목포의 노래’가 1등을 차지했다. 이 노래에 손목인이 곡을 붙이고 이난영이 부른 게 한국 가요사의 명곡으로 남은 ‘목포의 눈물’이다.

◇동시대 기록하며 시대의 초상화 그려

트로트의 특징은 강한 동시대성이다. 시대의 성취와 좌절, 슬픔과 기쁨을 담아내며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귀국선’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는 이들의 벅찬 희망을 담았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 산천 찾아서/(중략)/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단장의 미아리고개’ ‘가거라 삼팔선’ ‘굳세어라 금순아’ 등은 전쟁과 이산의 아픔을 노래했다. 나훈아의 ‘고향역’은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1960~70년대 이촌향도(離村向都)와 명절 귀성 풍경을 담았다.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처럼 ‘공항’을 소재로 만든 노래가 많이 불린 것도 이 시기였다. 파독 광부·간호사가 공항을 떠나며 떨군 눈물이 모티브가 됐다. 1980년대 한국인을 가장 많이 울게 한 사건은 KBS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었다.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봅니다’라는 설운도 노래 ‘잃어버린 30년’이 크게 히트했다.

가요 스트리밍 대비 트로트 음원의 스트리밍 비율

시대에 따라 바뀌는 가치관도 예리하게 포착했다. 1980년대 심수봉이 부른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속 여성상은 수동적이다. 그러나 10년 뒤 서주경이 부른 ‘당돌한 여자’ 속 여성은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 ‘술 한잔 사 주실래요’라며 ‘이런 내가 당돌하냐’고 묻는다. 우순실은 남녀의 헤어짐을 ‘꼬깃꼬깃해진 편지’로 표현했지만, 홍진영은 ‘사랑의 배터리’에서 식어버린 열정을 바닥난 휴대전화 배터리에 비유했다.

◇‘미스터 트롯’, 트로트 부활의 신호탄 쏴

지난달 30일 경기도 하남의 한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미스터트롯2-새로운 전설의 시작’ 녹화는 21세기 트로트의 진화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수백 명 트로트 팬이 응원봉을 흔들었다. 무대에선 록 트로트, 국악 트로트, 성악 트로트 등 2000년대 이후 등장한 다양한 트로트 곡이 울려 퍼졌다. 장유정 단국대 교수(대중음악사)는 저서 ‘트로트가 무어냐고 물으신다면’에서 트로트를 “뭐든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지닌 장르”라며 “변신과 포용력이 트로트의 힘”이라고 설명한다.

방척객도 트로트 전통인 2박자 단조 5음계에 익숙한 올드 팬에서부터 젊은 층까지 다양했다. 방청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강경우(31) 김소은(28)씨 부부는 장윤정 노래 ‘꽃’을 결혼 행진곡으로 택했을 정도로 트로트 애호가다. 강씨는 “아내의 임신을 축하하기 위해 방청을 신청했다”며 “아내가 즐기면 배 속 아기 태교에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회사 동료 사이인 황진경(35)씨와 임소현(33)씨는 “오전 10시부터 8시간째 보고 있는데 이런 게 바로 시간순삭”이라고 했다. 시간순삭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겼다’는 뜻이다.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열풍은 트로트가 우리 삶에서 갖는 의미를 곱씹게 한다. 트로트는 1990년대 이후 다소 침체를 겪었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위로와 치유’라는 트로트 본연의 힘을 발휘하며 뜨겁게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마음 놓고 밖에 나갈 수도 없던 사람들이 경연 참가자들이 부르는 노래와 들려주는 사연에 귀 기울였다. 2020년 1월부터 3월까지 전파를 탄 ‘미스터트롯’은 35%라는 전무후무한 시청률을 기록했다. 거리가 한산해질 정도였다. 임영웅 송가인 등 걸출한 스타가 탄생했다. 트로트의 새로운 100년을 향한 새 시대가 열렸다.

◇ 야광 응원봉에 맞춤 드레스코드까지... 공연장 풍경도 달라져

임영웅 첫 정규 앨범 ‘IM HERO’는 역대 트로트 가수로는 최초로 지난해 발매 1주일 동안 100만장을 넘겼다. ‘첫 1주일 100만장’은 음반 성공의 기준으로, 팬덤이 강력한 아이돌 그룹 가수들도 좀처럼 넘지 못한다. 음악 플랫폼 기업의 통계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지니뮤직의 가요 스트리밍 통계에 따르면 2018년 전체 가요 스트리밍 횟수 중 트로트 곡 비중은 1.4%에 불과했다.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이 판도를 바꿨다. 2020년 7.3%로 급등한 데 이어 2021년 12.6%까지 치솟았다. 2018~2019년엔 트로트 가수 노래가 한 곡도 없었던 지니뮤직 ‘월간 차트 톱100′에도 2020년부터 임영웅·영탁·김호중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2020년 24회, 2021년 22회를 기록했고, 지난해엔 40회를 넘겼다. 임영웅 신화를 목격한 가수 지망생들도 트로트 문을 노크한다. 공연기획사 밝은누리 임영민 부대표는 “미스터트롯2 도전자 상당수가 미스터트롯1의 성공을 보고 꿈을 키운 ‘미스터트롯 키즈’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트로트 가수가 되려면’, ‘미스·미스터트롯 드럼악보집’ 등 관련 서적도 팔린다.

업계에선 시장 규모도 이전에 비해 3배 이상 커졌다고 본다. 임 부대표는 “과거 트로트 공연은 나훈아 정도 되어야 매진을 기대할 수 있었는데 이젠 미스터트롯, 미스트롯 가수들이 출연하기만 하면 객석이 가득 찬다”고 바뀐 분위기를 전했다. 마해민 쇼플러스 대표도 “문화회관에서 하던 트로트 공연을 요즘엔 체육관에서 한다”며 “전에는 한 곳에서 1~2회 하고 공연을 끝냈지만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 이후엔 7~8회 할 정도로 관객층이 두꺼워졌다”고 설명했다.

아이돌 팬덤 못지않은 트로트 팬덤도 만들어졌다. 팬클럽이 생겨나고 드레스 코드를 맞추는 등 강한 결속력을 자랑한다. 송가인 팬클럽은 분홍색, 김희재 팬클럽은 주황색으로 맞춰 입고 객석을 차지한다. 블루투스가 연결된 야광 응원봉을 들고 시시각각 전구색을 바꿔가며 하트 만들기, 파도타기 등 응원쇼도 펼친다. 관련 산업 수익 규모도 크고 다양해졌다. 임영민 부대표는 “트로트 팬덤은 아이돌 팬덤보다 경제력 갖춘 중년층이 많아 현장 굿즈 판매가 잘된다”며 “CF·영화·해외 공연 등으로 진출도 활발해지고 있다”고 했다.

※참고한 책

‘한국대중음악사 개론’(서병기 등) ‘트롯의 부활’(김장실) ‘트로트 인문학’(박성건 등) ‘트로트가 무어냐고 물으신다면’(장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