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범 감독의 ‘엄마의 땅’.(BIFF 사무국 제공)

첨단 디지털의 시대에도 여전히 아날로그 수작업을 고집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25일 개봉한 애니메이션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을 함께 만든 박재범(32) 감독과 이윤지(31) 미술 감독 부부도 그런 경우다. 때마침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 물의 길’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시점으로 개봉일을 잡았다. 이들은 지난해 9월 결혼한 신혼 부부. 하지만 “애니메이션 작업 때문에 아직 신혼여행도 못 갔다”며 웃었다.

이들이 지난 3년 3개월간 매달렸던 장르가 스톱모션(stop motion) 애니메이션이다. ‘정지 동작’이라는 말뜻처럼 주요 인물과 동물들을 일일이 인형으로 만들고 수작업으로 움직여서 촬영한다. 외국에선 ‘월레스와 그로밋’부터 최근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피노키오’까지 아날로그적 질감을 느낄 수 있어서 사랑받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낯설다.

애니메이션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을 함께 만든 박재범·이윤지 부부 감독이 작품에 등장한 캐릭터들의 인형을 들고 있다. 46년 만의 한국 장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고운호 기자

이번 ‘엄마의 땅’은 지난 1977년 ‘콩쥐팥쥐’(감독 강태웅) 이후 46년 만의 한국 장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평가받는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서울독립영화제 등에도 초청받았다. 시베리아 툰드라 지대에 사는 부족 소녀의 모험을 그린 이야기. 등장인물과 동물들의 다양한 표정과 움직임을 드러내기 위해 캐릭터마다 50~60여 개의 얼굴을 미리 만들었다. 울창한 숲을 구현하기 위해 광주 무등산에 올라가 나뭇가지를 줍고, 오로라와 순록을 표현하기 위해 동대문과 부산 시장을 뒤지면서 미색의 실크 천과 가죽을 골랐다. 눈 내리는 장면은 스티로폼 알갱이를 썼고, 눈 덮인 설원(雪原) 장면에선 베이킹소다를 뿌렸다. 스톱모션만의 매력은 뭘까. 이들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캐릭터에 조명과 카메라를 통해서 생동감과 입체감을 더하는 방식이 꼭 영혼을 불어넣는 것만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하루 8시간씩 촬영하면 나오는 분량은 10~15초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렇다 보니 촬영 기간만 1년 4개월이 걸렸고, 사전 시나리오 작업과 후반 편집을 합치니 3년을 훌쩍 넘겼다. 박 감독은 “제작 과정이 길어지면서 ‘나 하나의 고집 때문에 제작진 30여 명이 모두 고생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마저 중도 포기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박 감독과 이 감독은 홍익대와 조선대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뒤, 2015년 애니메이션 회사에 입사 동기로 들어가면서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 그 뒤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도 단편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이들은 연애와 작업 기간에 대해 “전우애(戰友愛)로 뭉친 시기”라고 부르며 웃었다. ‘1인 다역(多役)’은 기본. 이번 애니메이션에서도 남편 박 감독은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아내 이 감독은 미술 감독과 애니메이션 작업은 물론, 주인공 그리샤 역의 목소리까지 직접 녹음했다.

손때 묻은 아날로그적 감성을 사랑한다는 점이야말로 이들 부부의 공통점. 박 감독은 필름 카메라를 아직도 사용하고, 이 감독은 LP 레코드를 즐겨 듣는다. 차기작으로도 오진희 작가의 ‘짱뚱이’에 바탕한 단편과 가족 모험극을 다룬 장편을 준비 중이다. 물론 이번에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이들은 “불편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기에 우리들의 삶과 닮은 것들을 사랑한다”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