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넷플릭스 주간 톱10 비영어 영화 1위에 오른 SF '정이'의 주연 배우 김현주. /넷플릭스

“모두가 다른 기대감으로 영화를 봤을테니까요. 누구에게나 다 좋을 수는 없고, 다 같은 생각으로 영화를 볼 수는 없으니까요.”

25일 연상호 감독의 SF ‘정이’가 넷플릭스가 공식 집계하는 주간 톱10에서 누적 1930만 시청시간으로 1월 3주차 비영어 영화 1위에 올랐다. 이날 오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정이’의 주연 배우 김현주(45)는 영화의 흥행 성적과 달리 긍정적이지 않은 평이 많은 데 대해 묻자, “억울한 건 없다”며 웃었다.

“그래도 영화의 ‘신파’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좀 아쉬워요. 저는 오히려 저희가 더 절제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정말 신파로 가려면 영화 막바지에 ‘니가 내 딸이니~’ 막 이러면서 껴안고 울고 불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하.” 소탈하고 거침없는 대답에 질문한 사람이 오히려 머쓱해진다.

◇연상호·김현주의 넷플릭스 ‘연타석 홈런’

고(故) 강수연 배우의 유작이 된 SF영화 '정이'가 25일 넷플릭스가 공식 집계하는 주간 누적 시청시간 톱10에서 비영어 영화 부문 1위에 올랐다. /넷플릭스

‘정이’는 한국 드라마 최초로 공개 당일 넷플릭스 시리즈 세계 1위에 올랐던 ‘지옥’ 이후 연상호(44) 감독과 김현주 배우가 함께 빚어낸 또 다른 히트작이다. 넷플릭스에서 연타석 홈런을 날린 셈. 김현주는 “오늘 아침에도 좋은 소식을 들어서 오랜만의 대면 인터뷰가 긴장되면서도 더 기분좋게 올 수 있었다”고 했다. ‘정이’는 이날 넷플릭스 주간 누적 시청시간 톱10 뿐 아니라 각국 순위에 점수를 부여해 총점을 합산하는 방식으로 글로벌 순위를 매기는 플릭스패트롤에서도 24일까지 나흘 연속 넷플릭스 영화 정상에 올랐다. 27국(전날 48국)에서 1위.

김현주는 “한국적 감성이 외국에선 오히려 신선하고 이색적으로, 그래서 특별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도 했다.

◇멜로 드라마 주인공에서 SF 전사로

사진=넷플릭스 '정이' 이미지컷

멜로 드라마의 주연으로 익숙한 배우 김현주에게 SF영화 ‘정이’의 전쟁 영웅 역할은 다른 차원의 도전이었다. 영화 자체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난이도 있는 SF 액션과 감정 표현을 함께 소화해낸 그의 연기에 대해선 호평이 많은 편. 연 감독은 ‘머리 모양과 의상 테스트 때 보니 김현주 배우는 ‘정이’ 그 자체였다’고 칭찬했었다. 김현주는 “그 때 이미 캐스팅된 상태였는데 안 어울렸으면 어쩔 뻔 했느냐”며 또 웃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었는데, 감독님이 제 안에 잠자던 실험정신, 도전정신을 깨워주신 것 같아요. 저도 정이를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했던 차였는데, 미완성 상태의 총을 들고 사진을 찍어보면서 ‘내가 ‘정이’다워지고 있는 건가’ 하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정이’는 ‘지옥’을 찍으면서 아쉬웠던 액션 연기를 마음껏 해볼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직접 하는 건 아니어도 원래 집에서 관련 방송을 틀어놓을 만큼 격투기를 좋아한다. 액션스쿨에서 다같이 땀흘리고 준비하는 과정, 주로 몸을 쓰는 역할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고 했다.

“시리즈 ‘지옥’ 촬영 때문에 액션스쿨에 갔더니 오래전 만났던 적 있는 무술 감독님들이 계셔서 반갑게 인사했어요. 그런데 감독님들이 ‘이젠 오지 말라’는 거예요. 제가 자꾸 아프고 다치니까 안쓰러워서, 하하하. ‘정이’ 때 또 가니까 ‘오지 말라는데 왜 또 왔냐’고 그러시더군요, 하하하.”

처음 경험하는 본격 액션 촬영, 그것도 그린 스크린과 녹색 슈트를 입은 무술팀과 함께 찍는 현장은 그에게 낯선 즐거움이었다.

◇”나, 얘 보면 눈물이 나” 했던 ‘수연 언니’

영화 '정이'에서 폐기 처분될 위기의 전투 기계 '정이'(김현주)를 구해내기 위해 귓속말로 비밀을 전달하는 '서현'(강수연). /넷플릭스

사람 대 사람으로 눈을 보면서 감정을 주고 받는 연기에 익숙했던 배우. 상대가 없는 상태로 감정을 끌어올리는 건 쉽지 않았다. “요즘 말로 ‘현타 온다’고 하잖아요, 하하. ‘이게 뭐지 내가 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어요. 현장에선 완성된 결과물도 상상이 잘 안 돼서 감독과 스태프들을 믿고 계속 달려야 했습니다.”

자신이 연기한 전쟁 영웅 ‘윤정이’의 딸이자 어머니의 뇌를 복제해 전투 인공지능을 대량생산하는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윤서현’ 역 강수연과의 연기는 잊지 못할 기억이다. “선배와 대사를 주고 받는 마지막 장면이 가장 마음에 많이 남아요. 유독 그날 감정이 많이 올라와 있었죠. 거의 막바지 촬영이었고. 수연 언니가 저한테 귓속말로 얘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저는 눈을 감고 있는데 ‘아, 나 얘를 보면 눈물이 나’ 하셨어요. 기계로 만들어졌지만 그리운 엄마의 모습을 만나는 딸의 마음, 초반에 드러내지 않던 그 감정을 오랫동안 끌고 오셨던 거죠.”

실험 대상인 AI ‘정이’를 표현할 때는 감정을 배제해야 했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빼는게 더 어려웠다”고 했다. “딸 서현과 마주칠 때 완전히 표정이 없어야 하는데, ‘무(無)’를 연기한다는 게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쉽지 않았어요. 기계였다가 깨어나는 순간은 가장 어려웠죠. 매 장면 다 다른 고통과 다른 감정으로 깨어나야 하니, 그걸 다르게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기계 얼굴 속 내 눈빛, 나도 깜짝 놀라”

영화 '정이'(감독 연상호)에서 전투용 인공지능으로 대량생산되는 전설적 용병 '정이'(김현주). /넷플릭스

왜 ‘정이’는 김현주여야 했을까. 그는 “캐릭터 설정 자체가 최정예 용병이지만. 강인한 전사의 이미지만을 원했다면 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감독님은 어쩌면 감성적인 부분과 감정 연기, 그 ‘+α(플러스 알파)’가 이 영화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요. 그 부분에 더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배우를 원하셨던 것 같아요.”

연상호 감독이 기계인 ‘정이’에게서 어떻게 감정을 드러낼지 걱정할 때면, 김현주는 영화 ‘월-E’ 얘기를 했다. 쓰레기 더미 지구에 홀로 남겨진 청소 로봇 이야기. “제가 ‘월-E’를 정말 좋아하는데, 로봇 눈에서 감정이 다 보이거든요. 보면서 엄청 울었고요. ‘깡통로봇도 감정이 다 보인다, 걱정하지 마시라’고 감독님을 안심시켜드렸죠, 하하하.”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인간 정이의 얼굴이 아닌 기계의 얼굴이 더 많이 등장한다. 얼굴 근육을 움직일 수 없는 CG(컴퓨터그래픽)로 만들어진 기계의 눈에서 배우 김현주의 눈빛이 느껴지는 건 이 캐릭터의 놀라운 지점이다. 김현주는 “충분히 CG로 재현 가능한데도 감독님은 늘 ‘김현주 얼굴에서 최대한 가져오자’고 하셨다”고 했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기계의 얼굴에 제 표정이 많이 살아 있었어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산에서 해가 뜰 때 바라보는 장면은 정말 저 자신과 너무 흡사해서 ‘CG 기술이 여기까지 온 건가? 사람 표정을 이렇게까지 재현하나’ 싶었습니다.”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것이 가장 인간다운 것”

'정이' 촬영 장면. /넷플릭스

김현주는 “처음 시나리오 읽었을 때는 깊은 메시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냥 지옥에서 못 다한 액션을 여기서 다 해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며 또 웃었다. “그런데 영화를 끝내놓고 보니 여러 생각이 들더군요. 인간의 가장 우월한 점이 어쩌면 가장 나약한 점일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과학기술 발달로 뇌 복제도 하는 미래지만 결국 그 기술로 ‘정이’ 같은 사람을 복제하려 하죠. 정이는 딸에 대한 사랑, 모성(母性)이 최강 용병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인 동시에 가장 큰 약점이었죠.”

김현주는 또 “결국 불안정하고 완벽하지 않은 것이 인간다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도 했다. “인생은 삶과 죽음의 길로 나뉘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걸 거슬러 영원히 존재하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죠. 영화를 찍고 나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완전하지 않아도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가장 인간다움, 인간스러움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요.”

요즘은 “정서적으로 더 파격적인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이번엔 몸을 쓰는 액션을 해봤으니, 약간 사이코패스나 아주 악녀라거나.”

‘정이’를 마친 뒤 그에겐 또 다른 꿈이 하나 생겼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는 것보다, 강수연 선배님처럼 좋은 선배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다 들어주고 다 품어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