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면에 부착된 키키 스미스 2017년 작 ‘세상의 빛’ 설명문을 한 여성이 바라보고 있다. 왼쪽은 일반 해설이고 오른쪽은 쉬운 글 해설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이해는 눈높이를 맞추는 데서 시작한다.

난해하고 불친절하며, 그래서 기피하게 되는 현대미술이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무릎을 조금 낮췄다. 미국 유명 여성 작가 키키 스미스(68)의 국내 첫 회고전에 쉬운 글 해설, 이른바 ‘Easy Read’를 도입한 것이다. 벽면에 붙은 다소 현학적인 설명문 옆에, 약간은 투박하지만 명료한 문장으로 다시 쓴 해설을 병기한 것이다. 작품만 봐서는 해석이 어렵고, 설명을 읽으면 더욱 아리송해지는 미술관의 자기반성인 셈이다. 학예실 관계자는 “일반 시민 등 33명이 참여한 워크숍을 진행해 7편의 쉬운 해설을 완성했다”며 “이후 발달장애인 4명의 감수까지 거쳤다”고 말했다. 그렇게 “중학생도 스트레스 받지 않을 설명문”이 마련됐다.

이를 테면 키키 스미스의 1990년작 ‘무제’(머리카락)에 대한 일반 설명문은 다음과 같다. “스미스는 고무로 자신의 머리와 목을 본뜬 캐스트를 만들고, 여기에 잉크를 묻혀 석판에 찍어냈다… 3차원의 대상을 재현할 때 윤곽을 따라 그리고 그대로 찍어내거나 사진을 촬영하는 등 주로 지표성을 활용하여 작업하는 제스퍼 존스의 작업과도 비교할 수 있다.” 속이 울렁거리는 해설이다. 이를 쉽게 옮기니 이렇게 변했다. “제목처럼 이 작품은 머리카락을 판화로 표현한 것이다. 스미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복사기로 인쇄해 판화로 만들었다… 자신의 모습을 작품으로 표현한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눈에 쏙 들어오도록 시(詩)처럼 행갈이도 했다. “미술이 낯설고 어려운 모두를 위한 해설” 덕에 개막 보름 만에 1만5000여 명이 전시장을 찾았다.

최대한 쉽게 쓴 글, ‘Easy Read’ 바람은 사회 전반에 불고 있다. 정보에도 취약 계층이 존재하고, 이에 대한 접근성 향상이 세상을 다채롭게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의 ‘손기정 청동 투구’ 안내서, 이제는 식문화 필수품이 된 ‘음식 배달 앱’(배달의민족) 사용 설명서 등이 ‘Easy Read’로 제작되는 식이다. 올해 대통령 선거 및 지방선거 당시에도 ‘Easy Read’가 쓰였다. 중앙선관위가 사회적 기업 소소한소통과 손잡고 공보물에 자주 등장하는 공약 관련 표현을 순화하고, 투표 방법을 알기 쉽게 보조 자료를 만들어 배포한 것이다. 영어로 된 카페 메뉴판, 복잡한 코로나 자가 진단 키트 사용 안내서에도 속속 ‘Easy Read’가 도입되고 있다. 소소한소통 주명희 본부장은 “이 같은 시도가 일상의 불편을 하나씩 줄여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법원 판결문에도 ‘Easy Read’가 처음 도입돼 화제를 모았다. 장애인 일자리 사업 불합격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한 청각장애인 A씨가 “알기 쉽게 판결문을 써 달라”고 한 요청을 재판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법률 용어 중에는 일상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생경한 표현과 한자어가 상당수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재판장 강우찬)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를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고 표현하거나, 글의 이해를 돕는 그림까지 첨부했다. A씨는 소송에서 졌지만 알 권리는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