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간(버추얼 휴먼) 아이돌을 데뷔시키는 대형 K팝 엔터사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가상 인간 역할로 데뷔하기 위한 실제 인간들의 경쟁 오디션도 늘고 있다. 이 참가자들은 가상 인간에게 목소리와 몸을 제공하는 대신 얼굴은 숨겨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원자는 잇따르고 있다.

인간형 택한 YG·캐릭터형 택한 카카오

“안녕! 내 이름은 새나야!” 나이 24세, 이름은 새나 리. 미국 UCLA 디자인-아트 미디어학부를 졸업한 이 여성의 취미는 꽃꽂이와 롤러스케이트 타기다. 새나의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악동뮤지션 공연을 즐기는 등 일상 사진도 다수 올라와 있다.

하지만 이 여성의 진짜 정체는 현실에 없는 가상 인간. 최근 YG플러스가 남성형 ‘이안’과 함께 자기 소개 영상을 공개한 여성형 가상 모델이다. 이 회사는 블랙핑크, 악동뮤지션, 위너 등이 속한 YG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다. 두 가상 인간 역시 YG의 K팝 앨범 기획력을 활용해 앞으로 음반 활동을 한다. 이후 해외 진출까지 목표하고 있다. YG플러스 관계자는 “악동뮤지션 이찬혁이 음반 작곡을 맡을 계획”이라며 “최근 ‘2022 하노이 한류 박람회’ 등 해외에서 팬을 만나는 행사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YG는 새나와 이안의 데뷔를 위해 지난 4월 한 달에 걸친 오디션으로 이들의 ‘본체’가 될 지원자를 뽑았다. 현존 기술로는 아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불가능하다. 가상 인간이 방송에 출연하려면 누군가 몸과 목소리를 제공해줘야 한다. 모델 에이전시 등의 추천을 받아 비공개 오디션으로 진행됐는데도 20대1 경쟁률을 기록했다. 가창력과 입담 등 실제 아이돌 연습생을 뽑는 깐깐한 평가 기준으로 선발했다고 한다. YG플러스 관계자는 “지원자 중 무명 프리랜서 가수도 다수 있었다”며 “외모에 구애받지 않고 못다 이룬 데뷔 기회를 얻는다는 점이 지원 동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신인 걸그룹 아이브, 가수 아이유 등이 속한 카카오엔터는 ‘캐릭터형’ 가상 아이돌 30명을 내년 초 카카오tv 예능 ‘소녀 리버스’를 통해 선보인다. 본체는 전·현직 K팝 아이돌 멤버들. 이들이 얼굴을 가린 채 버추얼 장비를 차고 가상공간 속 3D캐릭터로 분해 노래와 춤을 선보이고, 시청자들이 데뷔 음반을 낼 5명을 선택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강다니엘이 속한 그룹 워너원을 탄생시켰던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101′의 가상 인간 판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카카오엔터는 소녀 리버스와는 별도로 자사 전속 가상 인간 걸그룹도 제작 중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가상 인간 가수는 중소 기획사, 혹은 기술 홍보를 목적으로 한 스타트업이 주로 선보였다. 하지만 최근 대형 엔터사들까지 뛰어든 건 이들의 수익 기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어서다. 지난해 전 세계 유튜버 수퍼챗(후원금) 수익 순위 톱5는 루시아(22억), 코코(19억4200만) 등 노래하고 춤추는 일본의 가상 인간 유튜버들이 차지했다. 카카오엔터 관계자는 “K팝에 대한 전 세계 관심이 높아진 만큼, 이를 결합한 가상 아이돌 또한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를 타고 크게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최근 소녀 리버스 예선전 방송을 VR 채팅 플랫폼에 선공개했는데 시청자 30%가 일본,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해외 팬이었다”고 했다.

가상 아이돌의 음원 흥행 사례도 등장했다. 6인조 버추얼 아이돌 그룹 ‘이세계 아이돌’은 지난해 12월 데뷔곡 ‘리와인드’로 음원 사이트 벅스와 가온차트 1위, 멜론 36위를 차지했다. 인터넷 방송 플랫폼 트위치의 유명 스트리머 ‘우왁굳’이 150여 명의 지원자를 모아 온라인 경쟁 오디션 과정을 방송하고, 시청자 선택으로 멤버를 선발해 데뷔시킨 그룹이다.

업계에 따르면 가상 아이돌 활동비는 결코 싸지 않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캐릭터 제작 기술 투자비만 연간 5억원, 사람처럼 피부관리실·메이크업숍은 다니지 않지만 계절 따라 디자인을 바꾸는 비용과 홍보비 등 월 최소 2000만원 유지비가 든다”고 했다. 또 “편당 광고 단가가 기본 3000만원 선”이라며 “사람 모델처럼 인지도가 쌓인다고 단가가 확 높아지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신기한 형태란 화제성 덕분에 웬만한 신인 모델보다 높은 광고비가 책정돼 있다”고 했다.

광고 콘셉트에 맞춰 자유롭게 세계관을 부여할 수 있는 반면 학교 폭력 등 모델의 과거사가 불거질 리스크는 작다는 이점도 크다. YG플러스의 경우 새나와 이안에게 친환경 콘셉트를 부여했다. 관계자는 “최근 기업 광고주들이 ESG(지속가능한 친환경 경영) 정책을 중시한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