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꾸역꾸역 살아왔네. 30년이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디즈니+ 시리즈 ‘형사록’에서 이성민이 연기한 늙은 형사 ‘택록’은 중장년들이 울컥 공감하게 되는 명대사 제조기다. ‘누구나 다 제 발등 찧고 사는 법’이라는 그의 말대로, 늙어가는 건 발등에 찧은 흉터의 개수를 헤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드라마 ‘미생’의 노련하고 따뜻한 무역회사 부장부터 영화 ‘변호인’의 신문사 사회부 기자, 최근엔 ‘재벌집 막내아들’의 무도한 재벌 회장까지. ‘보안관’의 오지랖 넓은 전직 형사나 ‘부당거래’의 부장 검사, 처음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았던 영화 ‘공작’의 북한 고위 관료까지. 배우 이성민(53)은 소화 가능한 배역의 폭이 엄청나다. 출연작 목록을 보면 이렇게 많은 역할을 했었나 놀랍고, 모든 역할에 어쩐지 사람 냄새 나는 자기만의 이미지와 흔적을 새길 줄 아는 영리한 배우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형사 역할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그는 “조폭이나 검사 역할은 많았지만 진지한 형사는 무척 오랜만”이라며 웃었다. 지난 16일 디즈니+의 오리지널 드라마 ‘형사록’ 최종 7~8화 공개를 앞두고 인터뷰했을 때다. 이번엔 한때 이름 날리던 베테랑 형사였으나 모난 성격에다 과거의 상처가 겹쳐 소도시 경찰서에서 늙어가는 ‘택록’ 역할이다. 윗사람들 들이받다 강등을 거듭해 가족과도 떨어져 고시원에서 홀로 살아가는 ‘늙은 형사’ 역할이 어쩐지 그와 딱 맞아 떨어진다.

극 중 택록은 스스로 ‘친구’라 부르는 의문의 인물의 전화를 받으면서 살인 누명을 쓴다. 자신이 연관된 과거의 잘못들과도 싸워야 한다. 촘촘한 서사와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맞물려 긴장을 놓을 수 없게 하는 범죄 스릴러가 됐다. “‘친구’는 누구인지, 왜 택록을 함정으로 몰아가는지 함께 추적하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진지하게 역할과 이야기를 설명하는 그의 얼굴에 사람 좋은 웃음이 가득하다.

‘늙은 형사’는 원래 이 시리즈의 제목이기도 했다. 이성민은 “처음 딱 봤을 때부터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더라”고 했다. “늙은 형사의 늙음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부담도 됐죠. 택록이라는 인물은 과거의 사건들에 발목이 잡혀 어느 시점엔가 정체돼 있어요. 과거의 트라우마가 연결돼 현재를 위협하죠. 그 느낌을 살리려고 분장 스태프와 의논해서 머릿결을 짧고 빳빳한 직모로 세우고 의상과 구부정한 몸의 자세까지 신경을 썼어요.”

이야기와 상황을 엮어 긴장의 끈을 당기는 솜씨가 출중한 작품. 모든 게 의심스러운 택록의 눈엔 숲속에서 도망치던 진범 ‘친구’와 수사팀 막내 형사가 체구도 움직임도 똑같아 보인다. ‘너한테 제일 소중한 게 뭐냐’ 묻는 친구의 전화를 받으며 옥상에 배달된 아이스 박스를 열 때는 택록과 함께 시청자의 심장 박동 수도 올라간다. 자신의 입버릇 같은 ‘누구나 다 제 발등 찧고 사는 법이지’라는 말조차 다른 사람을 의심하게 하는 단서다. 후반부로 갈수록 더 극적 긴장을 높여가는 이야기는 스릴러물로선 큰 장점이다.

사실 제 발등을 찧으며 사는 건 극중 형사 택록만이 아니다. “내 이미지를 우려먹는 짓은 안 하겠다. 끊임없이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겠다”는 고집 탓에 이성민은 “친구들은 다 은퇴를 생각하는 나이”에 범인을 추적하며 뛰어다니는 장면을 찍느라 여기저기 관절이 아팠다. “덕분에 건강해졌나봐요. 한참 찍다가 ‘감독님, 저 당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그랬다니까요, 하하.” 택록은 ‘퇴직하면 절대 안 뛴다. 쫌만 참자. 연금이 코앞이다’ 혼잣말을 한다. 보통 사람들이 울컥 공감하게 되는 대사다.

늙은 형사의 늙음을 고민했던 그에게 배우로서 늙음은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로버트 드 니로 같은 배우도 젊을 땐 젊은 역할, 노인이 되면 젊은 배우를 받쳐 주는 역할로 나이에 맞는 연기를 계속하잖아요. 내가 꿈꾸는 멋진 연기를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도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쓸모 있어서 불러준다면 특별출연, 우정출연도 가리지 않고. 대신 작품 하나 허투루하지 않고.”

배우답게 늙어가는 법에 대해 말하는 50대 초반 배우의 얼굴에 예의 인간미 넘치는 웃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