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방일영국악상 수상자인 조순자 명창은 “가곡은 정적(靜的)이고 관조적이며 일정한 형식과 반주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판소리나 민요만큼 대중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 점 덕분에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우리 시대의 고전이자 명상 음악”이라고 말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보통 가곡(歌曲)이라고 하면 슈베르트나 홍난파의 노래들을 떠올린다. 지난 11일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의 가곡전수관에서 만난 무형문화재 가곡 보유자 조순자(78) 명창은 이 이야기에 길게 한숨부터 내쉬었다. “솔직히 우리나라 역사를 남에게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들지요. 수백년 이어져 내려온 우리 전통 가곡은 다들 까맣게 잊고 있으니….”

올해 29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인 조 명창이 60여 년간 갈고닦아 온 전통 성악이 국악이다.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시(時調詩)에 곡을 붙여서 거문고와 가야금, 대금과 세피리, 해금과 장구 등의 관현악 반주에 맞춰 부르는 전통음악이다. 조 명창은 “조선 시대 사대부와 중인, 악공(樂工)과 예기(藝妓)들이 사랑방에 모여서 시를 짓고 노래로 부르던 풍류와 멋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장르”라고 말했다.

전통 가곡의 또 다른 이름은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 말 그대로 오래도록 기쁨을 주는 노래라는 뜻이다. 요즘에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노래로도 불린다. 실제로 45자 안팎의 노랫말을 부르고 연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 10여 분. 남명 조식(1501~1572)이 지리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조 ‘두류산(頭流山) 양단수를’의 첫 소절인 “두류우우우사안~”을 부르는 데만 30초가 훌쩍 넘는다. 갈수록 짧고 자극적인 후렴으로 귀를 현혹하는 시대에 거꾸로 느림과 절제의 미학을 이야기하는 음악인 셈이다. 조 명창은 “2003년 태풍 매미가 들이닥쳤을 때는 집에서 혼자 정좌를 하고서 가곡을 불렀더니 모든 슬픔과 근심이 사라지면서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고 편안함을 되찾았다”며 웃었다.

물론 처음부터 가곡이 좋았던 건 아니었다. 1959년 가야금과 해금에 두루 능한 외사촌 언니를 따라서 KBS 국악연구생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내심 판소리나 민요를 전공하기를 바랐다. 조 명창은 “어린 나이에는 통성으로 구구절절하게 한(恨)을 토해내는 판소리나 화려한 기교가 돋보이는 민요가 멋있게만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국립국악원 초대 원장을 지낸 ‘호랑이 선생님’ 이주환(1909~1972)의 엄명에 꼼짝도 않고 부동 자세로 손바닥으로 장단을 치면서 한 곡씩 배워 나갔다. 1964년 난생 첫 해외 방문이었던 일본 순회 공연에서 스승과 함께 이중창을 하면서 국악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라는 청아한 가곡 특유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1970년 남편의 고향인 창원으로 내려와서 경남대 등에서 국악을 가르쳤다. 그는 “처음엔 학생들이 거문고와 가야금도 구별하지 못해서 라면 박스로 장구를 대신했고 대나무 우산대로 장구채를 만들어서 직접 치면서 가르쳤다”고 말했다. 2001년 무형문화재 가곡 예능보유자로 지정됐고, 2006년에는 세계 최초 가곡 전수관이 창원에 건립됐다. 2010년에는 종묘제례악·판소리 등에 이어서 가곡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조 명창은 “길고 느리게 부르는 가곡이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문화 예술이라는 걸 인정받기까지 반세기가 걸린 것 같다”며 웃었다.

국악에서도 학제 간 연구가 가장 활발한 분야가 가곡이다. 한국 고전문학부터 전통음악까지 역사·문학·음악에 두루 걸쳐 있기 때문이다. 조 명창 역시 국문학자들과 전통 가곡을 연구하는 모임을 통해서 학제 간 연구에 천착했다. 기존 여창(女唱) 가곡 15곡에 서른곡을 추가해서 1998년 여창 가곡 전집 음반(6장)을 완성했고, 2004년에는 악보집 ‘여창 가곡 마흔 다섯 닢’도 출간했다. ‘솔바람 같은 소리’라는 뜻의 ‘영송당(永松堂)’이라는 호를 국문학자인 조규익 숭실대 명예교수에게 받기도 했다. 그는 “문화재는 가곡이라는 예술을 평생 담는 그릇이며, 다음에 담아낼 그릇을 만드는 것이 제 임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