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현국

바나나를 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로 미셸 바나나다. 오랫동안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바나나다. 지금 전 세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먹는 바나나는 딱 한 종이다. 캐번디시 바나나다. 전 세계 바나나 수출량의 99%를 차지하는 품종이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더 많은 종류의 바나나가 유통됐다. 특히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그로 미셸 바나나는 19세기 프랑스 식물학자가 서구에 소개한 이후 오랫동안 가장 인기 있는 품종이었다.

그로 미셸 바나나는 캐번디시 바나나보다 향이 진하고 당도가 높은 걸로 알려졌다. 바나나 우유의 합성 바나나 향이 그로 미셸 맛을 흉내 낸 것이라는 일종의 도시 전설도 있다. 그로 미셸 바나나는 1960년대 ‘바나나 암’이라 불리는 파나마병이 유행하면서 전 세계에서 폐사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품으로서 가치는 사라졌다. 대형 과일 기업들이 그로 미셸을 대신해 선택한 것이 파나마병에 강한 캐번디시였다.

페이스북을 하다 친구가 올린 글을 봤다. 그로 미셸 바나나를 한국에서 주문해 먹었다는 글이었다. 곧바로 검색을 시작했다. ‘전설의 귀환. 타임머신 타고 온 그로 미셸 바나나’라는 문구가 보였다. 아직 그로 미셸 바나나는 죽지 않았다. 틈새시장을 노린 수입 업자들이 그로 미셸 바나나를 판매하고 있었다. 전설의 바나나를 먹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호들갑스럽게 비싼 가격에도 나는 과감하게 구매 버튼을 눌렀다.

바나나가 어디선가 오는 동안 카카오가 먹통이 됐다. 일 때문에 장거리 택시를 타야 하는데 카카오T가 말을 듣지 않았다. 카카오톡도 멈췄다. 나는 오래전에 깔았으나 사용하지 않던 ‘우버’ 앱을 열고 겨우 택시를 불렀다. 카카오톡 대신 일본인 친구들과 소통하기 위해 깔았던 메신저 ‘라인’을 이용해 업무 연락을 했다. 나는 도무지 그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그깟 데이터 센터 화재로 카카오가 멈췄다. 카카오가 멈추자 나라가 멈췄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단 하나의 회사가 만든 앱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일상이 단 하나의 테크 회사에 지배당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누구도 몰랐다. 한국인은 2022년 10월 15일에야 독점적 서비스가 지닌 위험을 깨달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범국민적 자각이라고 일컬어도 좋을 것이다. 한 회사에는 작은 소동이지만 한국인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카카오가 대국민 사과를 하는 날 그로 미셸 바나나가 도착했다. 하나를 까서 입에 넣는 순간 나는 감탄했다. 진했다. 캐번디시 바나나와는 확실히 다른 맛이었다. 더 나은 맛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각자의 미각은 다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선택지가 생겼다. 나는 곧 병충해에 약하다는 이유로 부사의 뒤편으로 거의 사라져버린, 어린 시절에 그렇게 좋아했던 홍옥 사과 판매처를 스마트폰으로 검색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라인과 텔레그램에 새로 가입했다는 알람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