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가 9월의 소설을 추천합니다. 이달 독회의 추천작은 2권. ‘여름과 루비’(박연준),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이주혜)입니다. 심사평 전문은 chosun.com에 싣습니다.

시인의 첫 소설답게 ‘여름과 루비’는 시 같은 산문 문장들로 이루어져 아득하면서도 선명하다.

서른여덟개나 되는 작은 제목들을 봐도 영락없는 시집의 목차다. 작은 제목에 해당하는 각각의 내용을 하나하나 독립된 챕터로 처리한 본문 편집도 시집의 모양에 가깝다. 그러나 이는 이야기의 시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 혹은 입장을 관철하려는 의도의 일환으로 보인다. 이야기의 전체라는 것은 관념이다. 사랑이나 미움처럼. 그것은 다르게 존재한다. “온전한 이야기는 없다.”(186쪽)고 했듯이 시간 및 서사 구성에서 ‘여름과 루비’는 과거와 현재, 원인과 결과들이 시간순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위아래로 동시에 겹치거나 그나마도 작은 챕터들로 분절되고 전도(顚倒)되기를 거듭한다. 이야기가 ‘온전’할 수 없으며 ‘전체’로 파악되지 않는다. ‘여름과 루비’의 이야기는 조각나고 뒤바뀌며 ‘다르게 존재한다.’

이야기가 그렇다는 것인데, 정작은 위의 인용문에서 이야기에 비유된 ‘사랑과 미움’이 그렇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일곱 살의 여자아이 여름과 루비가 어떻게 사랑을 시작했고, 열두 살의 그들이 어떻게 미워하고 헤어졌으며, 성인이 된 지금 지속되는 이별 속에서 사랑과 그것의 영원성을 사유하는 이야기기 때문이다. 여름과 루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후경으로는 학교 친구, 사촌, 자매, 부부, 부녀와 모녀 간의 애증사가 펼쳐진다. 그 아득하고 선명한 회상의 편린들이 마침내 사랑의 영원성에 필수적인 조건을 불러내는데, 이상하게도 그 조건이라는 것이 미움이며 이별이다. 팜 파탈, 아모르파티 등의 말이 있고 소설 본문에서도 ‘나를 망치러 온 구원자’라는 말이 등장하지만 미움과 이별에서 사랑의 영원성으로 건너뛰는 일은 누구에게든 쉽지 않아 보인다. 그것을 납득하려면 아무래도 ‘다르게 존재하는’ 진실이 필요할 것 같다. 말하자면 논리와 추론으로 ‘발견’해 내는 철학적 진실이 아니라, 감각과 상상으로 ‘창조’되는 문학적 진실 말이다. 시인 박준연으로 하여금 이토록 아득하면서도 선명한 소설을 쓰게 한 것도 어쩌면 그 진실이 아닐까.

☞박연준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산문집 ‘소란’ 등을 냈다. ‘여름과 루비’는 그의 첫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