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상남도 마산 출신이다. 지금은 이름이 없는 도시다. 외할머니 손을 잡고 따라간 시장에는 종종 약장수가 있었다. 살던 아파트 상가 앞에도 약장수가 왔다. 기록을 찾아보니 80년대 한국 시골이나 소도시 시장에는 언제나 약장수가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도 약장수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서울 출신이 아니라 도무지 이 칼럼을 서울 중심적으로 쓸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서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의 칼럼니스트로서는 큰 결격 사항이다.

약장수들은 말을 잘했다. 그들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약을 샀다. 만병통치약이었는지 동동구리무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어머니는 태평양화학 가정 방문 판매원에게 화장품을 샀으니 약장수가 팔던 ‘동동구리무’를 샀을 리는 만무하다. 여하튼 아모레퍼시픽이 태평양화학이던 시절까지 내가 다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약장수는 8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더는 시장이나 상가를 찾아오지 않았다. 가끔 아파트 단지를 배회하다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면서도 구걸하던 거지 모자도 오지 않았다. ‘오징어 게임’으로 다시 인기를 얻은 ‘달고나’ 아줌마도 오지 않았다. 고도성장기였다. 한국의 80년대는 많은 걸 깨끗하게 지웠다. 혹은 치웠다. 약장수의 시대는 갔다.

얼마 전 바이럴(입소문) 책 광고 하나가 온라인을 휩쓸었다. 온라인 교육 업체 강사라는 남자가 광고 속에서 말했다. “이렇게 고도성장한 나라에서 여전히 가난하다? 그건 정신병입니다.” 한국인에게는 가난을 죄악시하는 오랜 버릇이 있지만 ‘가난이 정신병’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뻔뻔함까지는 없었다. SNS 세상은 분노하고 한탄했지만 강사의 책은 이미 베스트셀러가 됐다.

며칠 전 내 페이스북에는 ‘국내 최초 연예인과 결혼한 고졸 남자의 연애’라는 온라인 강의 광고가 떴다. 지나칠 수가 없었다. 당신도 저 제목을 본 이상 광고를 클릭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을 것이다. 광고에는 빨간색으로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돈도 외모도 배경도 학벌도 없이 ‘유명 여배우’와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해서 저의 연애 이론을 증명한 세계 최초의 연애 강사.” 총 강의 시간은 16시간 20분 59초. 가격은 52% 할인 행사 적용 시 47만7000원. 강의는 한 달 만에 3억원어치 넘게 팔렸다고 한다.

나는 시장 약장수 차력 쇼를 보던 일곱 살 시절처럼 박수를 쳤다. 약은 팔려면 이렇게 팔아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경제적 고도성장기를 지나 마침내 정신적 고도성장기에 접어든 걸지도 모른다. 새로운 고도성장기에는 새로운 약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약이 필요한 시대에는 새로운 형태의 약장수가 등장한다. 올 추석에는 “왜 또 다단계 약장수한테 건강보조식품 사셨냐. 요강이 깨지는 약이 대체 그 나이에 왜 필요하시냐”고 부모님 타박하지 말자. 그 약이 요강을 깨지는 않겠지만 당신이 어제 구입한 자기 계발 온라인 강의보다는 자존감 회복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