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 도쿠조 특혜 분양 스캔들/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경성부가 근대 도시로 발전되어 감을 따라 부익부 빈익빈한 현상이 얼마나 날로 심하여지는지 이삼년전까지 수천에 불과하던 극빈민이 지금 와서는 동대문서 관내에 있는 빈민만 하여도 거의 일만이천으로 헤아리게 된 것만 보아도 짐작할 것이다.’

1929년 3월18일자 조선일보 사설 ‘경성부 빈민굴’은 급속한 도시화로 시내에서 밀려난 빈민(貧民)을 겨냥했다. 당시 이들을 토막민(土幕民)이라고도 했는데, 하늘만 겨우 가린 토막집에 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사설은 경성부(京城府·현 서울시)가 주관하는 부영(府營) 주택과 직업 소개소는 물론 빈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 시설을 마련하자는 제안을 한 뒤, ‘일 개인 도덕장(島德藏)의 토지를 위하여 10만원을 제공하는 경성부’가 이런 의료시설을 마련치 못할 이유가 있느냐고 따졌다. 당시 총독부 고위층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인 신당리(新堂里·현 신당동) 토지분양 사건 주역을 겨냥한 것이다.

1928년 신당리 토지 15만평을 헐값에 분양받은 일본인 시마 도쿠조. 오사카 주식취인소 이사장을 지낸 실업계 거물이었다.

◇도로 개설까지 약속하고 신당리 15만평 헐값 분양

이 사설에 나오는 ‘도덕장’은 오사카 부호 시마 도쿠조(1875~1938)를 가리킨다. 100년 전 경성을 떠들썩하게 한 신당리 토지 분양 사건의 장본인이다. 시마는 1928년 신당리 토지 15만 평을 헐값(평당 3원20전)에 분양받았다. 총 대금 46만6000원이었다. 신당리는 서소문과 함께 조선 시대 상여가 나가는 광희문 밖에 자리잡았다. 공동묘지와 일본인 화장장이 있고, 무당들이 많이 모여살던 곳이기도 했다. 경성이 과밀화되면서 신당리는 1920년대 주택지 후보로 떠올랐다. 이 노른자위 땅을 일본인 사업가 시마 도쿠조가 차지한 것이다.

◇'40만 부민(府民)보다 일개 도덕(島德)이 무서운 모양’

경성부는 시마에게 땅을 분양해주면서 장충동에서 신당리로 가는 동서도로(현 동호로)와 신당리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현 다산로)를 1929년 5월25일까지 개설해주기로 약속했다. 땅을 특혜 분양해주는 것도 모자라 경성부 예산으로 도로 개설까지 보장한 것이다. 이 도로 개설 예산 9만9440원이 1929년 예산안에 포함돼 부(府) 협의회에 올라온 게 앞의 사설이 나간 1929년 3월이었다. 부민들이 낸 세금으로 시마가 사들인 땅에 도로를 개설해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신석우 사장·안재홍 주필이 이끌던 조선일보는 연일 ‘신당리 토지문제’(4월2일자) ‘자승자박의 신당리 토지문제’(4월21일자)같은 사설로 권력형 특혜분양 의혹을 쏟아냈다. ‘사십만 부민(府民)보다는 일개 도덕(島德)이 무서운 모양’이라며 경성부를 드러내놓고 조롱하는 ‘팔면봉’ (3월16일자)까지 실렸다. 조선일보 뿐 아니라 동아일보는 물론 일본어 신문 ‘조선신문’까지 들고 일어나 연일 경성부, 그리고 배후의 총독부를 향해 집중 포화를 날렸다. 조선인 빈민들은 열악한 토막에서 굶주리는데, 식민지 조선의 공적 자금까지 쌈짓돈처럼 마음대로 끌어쓰는 악덕 실업인과 그를 비호한 권력에 대한 반감이 폭발했다.

◇도둑 연상시키는 ‘도덕 도로’로 불려

부 협의회가 반발하고 여론이 들끓는 바람에 계약 당시 경성부윤이던 마노(馬野)가 공개 사죄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도로 개설은 예정대로 착공됐다. 시중에선 이 도로를 ‘도둑’을 떠올리는 ‘도덕 도로’라고 불렀다고 한다. 시마는 닳을 대로 닳은 사업가였다. 도로가 거의 완성되어 가는데도 선금 13만원만 치르고, 잔금(?) 23만원(10만원은 어떻게 지불됐는지 불명확하다)을 내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경성 부윤이 오사카까지 시마를 찾아가 담판을 지었으나 성과가 없었다. 시마는 1930년 11월, 신당리 토지를 조선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돈을 빌려 대금을 치렀다. 그런데 그는 대금 지불은 물론 등기도 하지 않은 신당리 땅을 주택용지로 분할, 평당 15원~30원을 받고 팔아넘겨 거액을 챙겼다고 한다. 일본판 봉이 김선달이었다.

결국 이 땅을 동척이 1931년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를 계열사로 설립, 시마가 샀던 토지를 매입해 주택지 개발사업을 본격화했다. 신당리엔 당시 최고 인기였던 문화주택 단지가 대거 들어섰다.

◇'시마는 정무총감 정치 자금줄’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기자였던 김을한(1906~1992)은 회고록 ‘인생잡기’(일조각,1956)에서 신당동 토지불하 사건의 내막을 이렇게 소개했다. 야마나시 한조(山梨 半造) 총독이 1927년 12월 부임하면서 2인자 정무총감에 이케가미 시로(池上四郎)를 발탁했다. 이케가미는 순사 출신으로 오사카 시장까지 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 때 소문으로는 이케가미 총감이 오사카 시장으로 있을 때 시마 도쿠조라는 유명한 고리대급업자로부터 정치자금을 많이 얻어 쓴 일이 있었는데 시마는 이케가미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되자 오랫동안 대어 준 정치자금을 받아 낼 때는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하여 정무총감의 뒤를 쫓아서 서울에 왔으며 이케가미는 그의 나름대로 지금까지 신세진 것을 갚으려고 비밀히 경성부윤 마노(馬野精一)에게 부탁해서 장충단 일대의 광대한 부유지를 시마에게 거저 주다시피 한 것이다.’

경성부가 시마에게 도로 개설을 약속하거나 경성 부윤이 독촉하는데도 대금을 납부하지 않고 버틴 데는 그만한 연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시마 도쿠조는 주식 브로커 출신으로 오사카 주식취인소 이사장(1916), 한신전철 사장(1927), 일본휘발유회장, 상해 취인소 소장, 천진·한구 취인소 이사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1937년 배임 횡령 사건으로 징역 5년형을 받고 항소하던 중 병사했다고 한다. 권력형 부패 스캔들 장본인다운 최후였다.

◇참고자료

김을한, 인생잡기,일조각,1956

최병택, 예지숙, 경성리포트, 시공사, 2009

이경아, 경성의 주택지, 도서출판 집,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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