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제19회 평창대관령음악제 개막 공연에서 손열음이 연주하고 있다. /(평창=연합뉴스)

평창에서는 화분마저 악기가 된다. 지난 2일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 뮤직텐트에서 열린 제19회 평창대관령음악제 개막 연주회. 공연 직전 무대 위에는 텅빈 화분 4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난해 타계한 미 현대음악 작곡가 프레데릭 르제프스키(1938~2021)의 ‘대지에(To the Earth)’를 연주하기 위한 악기들이었다.

잠시 후 무대에 올라온 KBS교향악단의 타악 연주자 매튜 에른스터는 양반다리로 화분들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크기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음(音)높이를 지닌 화분들을 타악기의 채로 두드리자, 실로폰처럼 경쾌하면서도 청명한 음악이 울려퍼졌다. 작곡가는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운반할 수 있는 화분을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에 착안해 이 곡을 썼다. 연주를 맡은 에른스터는 “양재동 꽃시장에서 100여 개의 화분을 직접 두드려 보면서 가장 어울리는 음색을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이날 ‘화분 연주’에 맞춰서 에른스터는 고대 그리스의 시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게’를 영어로 암송했다. “대지여, 모든 이의 어머니여. 굳건한, 가장 오래된, 모든 생명을 먹여살리는 그녀를 위해 노래하리.” 그가 읊는 시와 연주는 코로나 이후 치유와 회복을 기원하는 현대적 무가(巫歌)가 됐다.

평창대관령음악제 2일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 뮤직텐트에서 열린 19회 평창대관령음악제 개막 공연에서 KBS교향악단 타악 연주자인 미국 출신의 매튜 에른스터가 르제프스키의 '대지에'를 연주하고 있다. 그가 실제로 타악기의 채로 연주한 건 4개의 화분이었다.

올해 대관령음악제의 주제는 ‘마스크’. 다음 곡인 미 작곡가 조지 크럼(1929~2022)의 ‘고래의 노래’를 연주한 음악감독 손열음(피아노), 조성현(플루트), 김두민(첼로) 역시 모두 마스크를 쓰고서 무대로 올라왔다. 그런데 마스크를 쓴 위치가 독특했다. 평소처럼 입과 귀가 아니라 눈 주변을 가리는 얼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무대 조명마저 짙은 청색으로 바뀌자 흡사 배트맨이나 캣우먼 세 명이 나란히 출동한 듯했다. 모두 작곡가의 지시에 따른 것. 수십억 년 전의 시생대(始生代)부터 현대까지 지구의 역사를 8개의 악장에 담아낸 문제작이다.

조성현은 플루트 연주와 노래를 겸하다가 마지막에는 휘파람까지 직접 불었다. 그는 “연주도 어렵지만 무대에서 떨리면 휘파람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기 때문에 막판까지 걱정했다”며 웃었다. 손열음 역시 피아노 건반을 힘차게 내리친 뒤 곧바로 건반 뒤의 현을 뜯었다. 김두민은 신비로운 울음 소리를 첼로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타악기도 연주했다.

평창대관령음악제 2일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 뮤직텐트에서 열린 19회 평창대관령음악제 개막 공연. 플루티스트 조성현(왼쪽부터), 첼리스트 김두민,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눈 주변을 가리는 얼굴 마스크를 쓴 채 조지 크럼의 '고래의 노래'를 연주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백남준의 행위 예술에서 시작해서 존 케이지의 현대음악으로 넘어갔다가 프랑스 작곡가 메시앙의 종교적 분위기로 끝나는 듯한 묘미가 있었다. 음악 감독 손열음은 “최근 세상을 떠난 두 작곡가를 기리는 동시에 코로나 시대를 맞아 지구와 자연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작품들”이라고 선곡 취지를 밝혔다.

평창대관령음악제 2일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 뮤직텐트에서 열린 19회 평창대관령음악제 개막 공연. 에스메 4중주단이 코른골트의 현악 4중주 2번을 연주하고 있다.

현대의 파격과 고전의 전통이 공존하는 것도 이 음악제의 매력. 후반부에는 2018년 런던 위그모어홀 콩쿠르 우승 이후 세계 음악계에서 주목 받는 한국 여성 실내악단 에스메 4중주단이 코른골트의 현악 4중주 2번을 들려줬다. 19세기 빈의 우아한 고전미 사이로 20세기적인 비탄이 흐르는 걸작. 그 뒤 이들은 프랑스 출신의 모딜리아니 4중주단과 함께 한불(韓佛) 합작으로 멘델스존의 8중주를 연주했다. 올해 음악제는 23일까지 역대 최장 기간인 3주 동안 계속된다. “잘츠부르크 음악제처럼 여름 내내 대관령에서 음악이 흘렀으면 좋겠다”는 손열음 감독의 꿈이 조금씩 무르익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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