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건립 85년만에 철거 결정이 내려진 서울 지하철 2호선, 5호선 충정로역 앞 충정아파트. 건립 당시엔 경성의 첨단 주거시설이었다.

1930년에 세워진 충정아파트가 헐린다고 한다.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에서 지난 6월15일 지하철 2·5호선 충정로역 일대를 재정비하는 계획안을 통과시키면서 아파트 철거 결정을 내렸다. 건립 85년이 지난 건물이기 때문에 안전문제도 심각하고, 재건축을 원하는 주민 의견도 많았다고 한다, 경성의 첨단 주거지로 각광받던 영화를 뒤로 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경성의 첫 아파트는 사실과 달라

충정아파트는 한때 1930년 건립된 경성 최초의 아파트로 알려졌다. 하지만 건축물대장을 확인한 결과 1937년8월29일 신축된 것으로 드러났다.(이연경 등, ‘근대도시주거로서 충정아파트의 특징 및 가치’ 23쪽) 처음엔 건축주 이름을 따 도요타(豊田) 아파트로 불렸다. 당시 드문 철근 콘크리트 4층 건물이었다. 경성 첫 아파트는 1930년 남산 회현동에 들어선 미쿠니 아파트다. 미쿠니(三國) 상사 합숙소로 건축된 이 아파트는 92년이 넘은 지금도 주거 시설로 사용중이다.

도요타 아파트는 마포와 도심을 연결하는 대로변에 자리잡았다.아파트 남서쪽엔 죽첨정 삼정목(竹添町 三丁目)(현 충정로 3가)전차 정류장이 있어 교통이 편리했다. 그래서인지 교통사고 기사에 이 아파트가 등장한다. ‘만원 전차에 뛰어올라타다가 떨어져 뼈가 부러졌다. 부내 죽첨정(竹添町)삼정목 이백칠십팔번지 인쇄직공 이풍재(李豊在·23)라는 사람은 7일 오후7시에 서대문에서 마포로 가는 전차에 뛰어올라 매달려가다가 죽첨정 삼정목 풍전(豊田)아파트 앞에서 떨어져 왼편 쇄골(鎻骨)이 부러졌다. 약 한달동안 치료받을 중상이다. 그는 문을 닫고 진행하던 만원전차에 뛰어탔다가 그런 변을 당한것이다.’( ‘만원전차에 매달렸다 낙상’, 조선일보 1939년10월9일)

죽첨정이란 이름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일본 공사였던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성을 따서 1914년부터 쓰였다고 한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바꾸면서 충정로가 됐다.

◇황산덕과 김환기, 도요타 아파트 주민

도요타 아파트에 살았던 유명인으론 황산덕과 김환기가 거론된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열여덟살 황산덕(1917~1989)은 1935년 경성제대 예과(豫科)에 입학했다. 당시 예과는 청량리에 있었다.

‘대학 예과를 수료할 무렵에 그보다 1년 선배로 먼저 본과 법학과에 다니고 있는 홍진기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는데, 법학과 본과가 동숭동에 있었으므로 본과 시험 합격 후 도요타 아파트에 방을 얻어 살며 매일 명동에서 방황하며 한 학기를 보냈다.’ ‘황산덕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시 경성제대 예과는 2년에서 3년 과정으로 바뀐 뒤였으므로, 황산덕은 1938년 도요타 아파트 319호에 세들어 살았다. 그해 가을 몇 번의 데이트를 한 여성과 살림을 시작했고. 법학과 2학년을 마친 뒤 도쿄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도요타 아파트는 1937년 들어섰으니, 준공 1년도 안된 새 아파트에 입주한 것이다.

황산덕은 해방 후 서울대법대 교수를 거쳐 성균관대 총장, 법무·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서울대법대 교수시절인 1954년 정비석의 신문 연재소설 ‘자유부인’의 선정성을 비판하는 논쟁을 벌인 주역으로도 유명하다.

황산덕이 이 아파트를 떠날 무렵, 훗날 스타로 떠오른 화가가 입주했다. 김환기다. 그는 일본미술협회가 1940년 5월 도쿄 우에노공원에서 개최한 ‘자유미술전’에 출품했다. 당시 전시회 목록에 김환기 주소가 ‘경성부 죽첨정 도요타 아파트’로 나온다. 아파트는 단기 체류자도 받는 숙박시설이었다. 유족한 집안 출신인 두 사람이 도요타 아파트에 거주했다는 사실은 이 아파트가 당시 첨단 주거지로 꽤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1937년 준공된 서울 충정로2가 충정아파트. 준공당시엔 도요타아파트로 불렸다. 곧 철거될 운명이다.

◇생선가게 하던 도요타가 건축

도요타 아파트 주인은 일본인 도요타 타네마쓰(豊田種松)였다. 1923년 ‘경성상공명록’에 따르면, 도요타는 한강로 주변에서 생선가게를 했다. 한때 세급을 못낼 만큼 어려웠던 모양이다. 1929년4월26일자 조선일보엔 세금 체납으로 가옥 40호가 경매에 넘어간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여기에 도요타가 나온다. 세금 74엔48전을 못 내 집까지 경매에 넘어갈 지경이던 도요타가 무슨 돈으로 경성의 최신식 아파트를 지었는지 알 수 없다.

1939년 경성상공명록에 따르면, 도요타는 죽첨정 3정목 250번지, 즉 도요타 아파트 1층에서 생선가게(魚店)를 하면서 식당을 겸업했다. 1940년 그는 아파트에서 호텔로 업종 변경을 한다.

‘관광씨—즌을 앞두고 요사이 경성을 비롯하여 각 도시의 아파—트 경영자가운데는 호텔이나 여관으로 방향전환을 하여 톡톡이 이익을보려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경성에서는 크기로 유수한 죽첨정(竹添町)삼정목 풍전(豊田)아파—트도 얼마 전 소관 서대문서로부터 현재 들어있는 사람을 새로 집을 짓고 이사를 시킬 것을 조건으로 호텔 허가를 마덧는데 주택난 해결에 골치앓고 있는 총독부 사회과에서는 이와 같은 전향자가 속출하면 도시의 주택난을 일층 심하게 한다고 수일전 각 도에 엄중한 통첩을 하여 금후로는 이와 같은 전업을 절대로 허가하지 않기로 되었다.’(‘아파—트 여관전업, 금후는 절대 불허방침’, 조선일보 1940년6월1일)

호텔 영업허가를 막차로 따낼 만큼 수완은 좋았지만, 사업은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다. 전쟁 탓이 컸을 것이다. 호텔에서 오뎅술집으로 다시 업종을 바꿨다.

5.16 직후인 1962년 '반공의 아버지' 행세를 하며 '충정아파트'를 분양받아 호텔문을 연 김병조. 10여 년이 지난 후에도 광복 30주년 특집에서까지 다룰 만큼, 대단한 사기극의 주역이었다. 조선일보 1975년3월22일자.

◇'혁명’을 속인 사기꾼 김병조

해방 이후 도요타 아파트는 귀국 동포들이 점거했다. 6.25 와중에 미군이 인수해 트레머 호텔로 이름을 바꿨다. 미군 숙소와 사무실용이었다. 그러다 5·16 이후 사기극에 휘말린다. 1962년3월1일 아들 여섯이 6·25전쟁에서 전사했다는 김병조라는 인물이 ‘반공의 아버지’로 불리며 건국공로훈장을 받고 호텔까지 불하받아 코리아호텔을 연 것이다. 하지만 다섯달 만에 허위날조라는 사실이 밝혀져 김병조는 구속됐다. 호텔은 1962년 11월23일 문을 닫았다.

이 사기극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혁명’을 속인 사기꾼”(조선일보 1962년8월21일), “공소사실 부인 가짜 ‘반공의 아버지’”(1962년10월12일) ‘문 닫혀버린 코리아호텔’(1962년 11월24일) 등 연일 신문에 보도됐다. 광복 30년 기념 세태 기획에 ‘가짜 인물’(1975년3월22일)의 대표 사례로 가짜 이강석(이기붕 아들이자 이승만 양자)과 나란히 실릴 만큼 세인들의 기억에 뚜렷히 남았다. 호텔은 그 뒤 몇 사람 손을 거쳤으나 1967년까지 철조망을 둘러친 신세로 방치됐다.

1979년 도로확장공사로 충정아파트 일부가 헐린다는 뉴스를 전한 조선일보 1979년2월3일자 기사

◇1979년 도로 확장 공사로 일부 헐려

호텔은 그후 주거시설로 쓰였다. 1970년대엔 유림아파트로 불린 모양이다. 아파트는 1979년 도로확장공사로 일부가 헐렸다. 건물의 기구한 운명이 ‘한국 첫 아파트가 헐린다’(1979년2월3일)는 기사로 다시 회자됐다. 그후로도 40년 이상을 버텼다. 하지만 초록빛 충정아파트의 모습을 볼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같다.

◇참고자료

박철수, 권이철, 오오세 루미코, 황세원 지음, 경성의 아파트,집,2021

이연경, 박진희, 남용협, ‘근대도시주거로서 충정아파트의 특징 및 가치’, ‘도시연구:역사·사회·문화’ 20호, 2018.10

박상현, ‘충정아파트의 일본인 건물주 성명 고찰’, ‘일본문화연구’ 제 80집,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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