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시절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이효석. 같은 해 하얼빈을 여행한 이효석은 도시 이름을 딴 '하얼빈'을 비롯 '벽공무한'같은 단편과 여행 수필 여럿을 썼다.

‘호텔이 있는 기타이스카야 가(街)는 하얼빈의 국제도시로서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이 부근은 완전히 슬라브색(色)으로 된 순(純) 외인가(外人街)인 점에서 기왕 온 김에는 이국 정조를 몇날이나마 맛보는 것이 낫겠다는 ‘보헤미안’기질에서….’(조선일보 1936년4월3일 ‘만주기행-과도기의 도시 하얼빈 瞥見’)

조선일보 외보부장 겸 논설위원 홍양명(1906~?)이 1936년 하얼빈 기행문을 썼다. 제정 러시아 시절 유럽풍 도시로 건설한 하얼빈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피해 백계(白系) 러시아인들이 모여든 국제도시였다. 파리의 유행이 2주 뒤면 하얼빈에 날아온다는 말이 나돌 만큼,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곳이기도 했다.

홍양명이 묵은 모데른은 백계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호텔이었다. 1932년 만주사변 진상 조사를 위해 국제연맹이 파견한 리튼 조사단이 이 호텔에서 3주일 동안 묵었다. 세계에서 기자들이 모여드는 뉴스의 현장이 됐다.

옛 유럽식 건물이 줄지어 서있는 하얼빈의 키타이스카야가. 이효석과 홍양명이 묵은 모데른 호텔도 이 거리에 있다./위키미디어

◇평양서 아침 기차 타면 다음날 새벽 하얼빈 도착

평양에서 아침에 특급 히카리 호를 타면 당일 밤 신경(장춘)을 거쳐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했다. 기차를 타고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여행가던 시절이었다. 소설가 이효석은 1939년 두 차례 만주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하얼빈 배경의 단편소설 ‘하얼빈’ ‘벽공무한’, 그리고 여행수필 ‘대륙의 껍질’ 등을 발표했다. 소설가 최명익이 1939년 발표한 ‘심문’도 하얼빈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이다. 음악평론가 김관은 하얼빈을 여섯번이나 다녀왔다.

하얼빈은 이렇듯 조선의 지식인, 작가,예술가들이 가고 싶어하는 이국적 취향의 여행지였다. 러시아와 일본계 백화점이 들어서고. 미국계 은행이 영업하는 국제도시였다. 50개 이상의 민족집단과 45종의 언어가 혼재하는 이곳은 진정한 다문화도시였다. 1930년대 동아시아에서 상하이와 함께 비아시아인 중심의 유명 오케스트라가 있었던 곳이 하얼빈이었다. 러시아 출신 단원들이 다수인 하얼빈 교향악단이 정기 연주회를 열고, 캬바레와 바가 즐비한 이 도시는 문화와 예술, 향락이 공존했다. 신문·잡지에 하얼빈 기행문이 자주 등장한 이유다.

이효석과 홍양명이 묵은 하얼빈 중심가 키타이스카야가의 모데른 호텔. 1939년 하얼빈을 여행한 이효석은 3층 객실 창가로 거리를 내려다보며 이국적 정취를 소설 '하얼빈'에 담았다. 지금도 호텔로 영업중이다.

◇하얼빈 무대로 삼아 작품 쓴 이효석

이효석도 키타이스카야 중심가 모데른 호텔에 묵었던 모양이다. 3층 객실 창으로 내다보는 거리 풍경을 즐겼다. ‘나는 이 삼층의 전망을 즐겨 해서 방에 머무르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창가 의자에서 지내기로 했다. 아침 비스듬히 해가 드는 거리에 사람들의 왕래가 차츰차츰 늘어가려 할 때와 저녁 후 등불 켜진 거리에 막 밤이 시작되려 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때이다. 조각돌을 깔아놓은 두툴두툴한 길 바닥을 지나는 마차와 자동차와 발소리의 뚜벅뚜벅 거치른 속에 신선한 기운이 넘쳐 들리고 여자들의 화장한 용모가 선명하게 눈을 끄는 것도 이런 때이다.’(‘하얼빈’,’문장’제19호, 1940.10 )

소설 주인공은 호텔을 나와 주택가, 영사관, 송화강가로 이어지는 산책을 즐긴다. 폴란드계 혼혈인 캬바레 댄서 유라와 함께다. ‘마당같이 넓은 행길에는 느릅나무의 열이 두 줄로 뻗쳐 있고, 양편의 주택은 대개가 보얀 계란빛으로 되어서 침착하고 고요한 뒷골목인 셈이다.’ 산보객은 2차대전에 휘말린 프랑스 영사관, 화란 영사관을 지나간다. 송화강변 요트 구락부 갑판에 앉아 뽀이의 서비스를 받으며 식사를 즐긴다. 차이콥스키 실내악 연주가 흘러나온다. 고국에 돌아갈 여비를 벌기 위해 팁을 모으는 늙은 뽀이와 댄서, 여급까지 모두 백계 러시아인이다.

◇음악평론가 김관의 하얼빈 기행

‘회색빛 하늘 느릅나무, 둥근 사원, 억센 건물, 광막한 우울…이것이 하르빈을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이었다.’(하르빈, ‘인문평론’ 2권2호, 1940.2)

음악평론가 김관은 하얼빈의 첫 인상을 이렇게 요약한다. 키타이스카야는 역시 서두에 등장한다. ‘석축으로 차근차근 깔아놓은 도로와 낡아빠지기는 했어도 두터운 흰 벽과 거무죽죽한 지붕, 모두가 구식으로, 고색창연한대로 잡연히 늘어서 있는 거리!...캬바레, 호텔, 다점, 땐스 홀, 매소부정숙(賣笑婦定宿), 스트리트 걸, 도박장, 극장 등등’. 김관은 ‘좁고 더럽기는 해도 서구의 도시가 슬라브에 이식된 균정된 도시를 북만뜰 가운데 다시 이식해놓은 거리로 오직 제정시대의 식민지에 불과했지만은 전통적인 러시아 문화의 잔재가 어느모로든 남겨져있는 것같다’고 썼다.

생활고는 물가 상승으로 심해졌지만, 음악과 무용, 미술 등 풍부한 문화예술 향유로 그럭저력 버텨나간다는 외지인의 관찰이었다.

◇클래식과 발레·댄스의 도시, 하얼빈

하얼빈은 음악의 도시였다. 당시 30년 역사가 넘은 하얼빈 교향악단은 월2회 정기연주회를 가졌다. 콘서트장은 백계 러시아인을 비롯, 미·영·독과 체코, 폴란드인 등 서구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해 유럽 공연장에 온 것같았다.

여름 시즌이면, 콘서트가 끝난 뒤 구락부 후정(後庭)에 있는 야외연주장에서 새벽 한두시까지 댄스 파티가 열렸다. 젊은 남녀는 이곳에서 만나고 달콤한 연애를 했다. 김관은 ‘아지아와 모데른 극장에선 매주 일요일 발레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오페레타가 상연되고 간혹 러시아 연극까지 공연된다’고 썼다.

◇세계적 베이스 샬리아핀 하얼빈 공연

홍양명이 1936년 3월 하얼빈을 방문했을 때, 마침 세계적 베이스 표트르 샬리아핀이 사흘간 리사이틀을 했다. 백계 러시아인들은 샬리아핀을 뜨겁게 환영했다. ‘일본에서 파기록적인 보수로 ‘스케줄’을 마치고 상해, 다롄을 거쳐 이곳에 온 것은 이곳에 사는 오육만 백계러인의 갈망에 보답키위한 것이라고 한다…사흘간의 입장권은 하룻밤 5원,3원의 고액임에 불구하고 그가 이곳에 오기전 일주일전에 벌써 매진되었다고, 호텔 모데른의 뽀이는 노인 특유의 ‘제스처’인 어깨를 한쪽으로 으쓱하면서 자랑스럽게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퇴폐를 말하는 하얼빈의 밤’, 조선일보 1936년 4월7일)

일본이 1932년 만주국을 세운 이후, 하얼빈은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운영한 철로를 통해 일본,조선과 이어졌다. 세균전 실험이 이뤄진 곳도 이 철도 끝자락 하얼빈이었다. 조선 지식인의 하얼빈 기행은 어딘가 기이하면서도 쓸쓸한 자화상과 맞닥뜨리는 여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참고자료

이효석, ‘하얼빈’, ‘문장’제19호, 1940.10

김관, ‘하르빈’, ‘인문평론’ 2권2호, 1940.2

이미림, ‘하얼빈’의 산보객 시선과 근대도시 풍경 고찰,우리문학연구 제61집, 2019.1

박종흥, ‘하얼빈’공간의 두 표상-심문과 합이빈의 두 대비를 통한’, 현대소설연구 제62호, 20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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