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왼쪽)과 일본계 미국 작곡가 폴 치하라가 17일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서 환하게 웃고 있다. /김지호 기자

지난해 그래미상을 받은 한국계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44)은 그해 연말 일본계 미국 작곡가인 폴 치하라(84)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치하라는 정통 클래식뿐 아니라 100여 편의 영화·드라마 음악을 작곡한 거장이다. 두 음악가의 나이 차는 꼭 40년. 하지만 용재 오닐은 2008년 치하라의 실내악 ‘미니도카’의 음반을 녹음한 인연으로 음악적 우정을 쌓아왔다. 최근 방한한 작곡가는 17일 본지 인터뷰에서 “작년에 통화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용재 오닐을 위한 비올라 협주곡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탄생한 치하라의 비올라 협주곡이 세계 초연된다. 19~2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서울시향 연주회다. 세상에서 처음으로 빛을 보는 이 협주곡의 연주는 물론 용재 오닐이 맡는다. 치하라는 “내 협주곡은 용재 오닐을 위한 음악적 초상화”라고 불렀다. 용재 오닐은 “어릴 적부터 치하라의 비올라 작품을 들으면서 자랐다. 치하라 같은 거장 덕분에 비올리스트들이 연주할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에게는 아시아계 음악인 말고도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유년 시절의 시련이다. 치하라는 2차 대전 당시인 1942년 미국 아이다호주(州)의 수용소에서 온 가족과 함께 3년간 억류됐다. 당시 수용소의 이름이 ‘미니도카’다. 치하라는 “당시 일본과 맞서 싸웠던 미국에서는 우리(일본계 미국인)를 스파이로 의심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면서 “우리는 일본에서도 적(敵)이었고 미국에서도 증오와 반감 속에서 갇혀 있었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그가 음악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곳도 수용소였다. 치하라는 “TV도, 컴퓨터도, 휴대전화도 없었던 시절에는 오로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뿐이었다”면서 “라디오를 통해 세상의 모든 노래를 들으면서 수용소 생활을 견뎠다”고 말했다. 전후 바이올린을 배운 그는 6·25전쟁 당시 한국 파병을 앞둔 미군들을 위해 미 서부 기지를 돌아다니며 위문 공연을 했다. 그는 “무용수와 코미디언들이 참여한 당시 위문단에서 내가 최연소 단원이었다”며 웃었다.

용재 오닐 역시 6·25전쟁 직후 미국에 입양된 전쟁 고아 이복순(69)씨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어릴 적 뇌 손상으로 정신 지체 장애를 지닌 미혼모다. 워싱턴주 시골 마을에서 TV 수리점을 했던 아일랜드계 미국 조부모가 어릴 적 용재 오닐을 돌보았다. 요즘 말로는 ‘흙수저’ 출신인 셈이다. 용재 오닐의 양할머니는 10년간 그의 레슨을 위해서 왕복 200km를 손수 운전하면서 뒷바라지했다. 그는 “보통 클래식 음악은 부유해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잃을 것이 없었기에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고 말했다. 용기와 재능이라는 의미의 ‘용재(勇才)’라는 한국식 이름은 줄리아드 음대 재학 시절 그의 스승인 바이올리니스트 강효 교수가 지어줬다. 지금도 한국에서 활동할 때는 ‘용재’라는 중간 이름을 꼭 넣는다.

치하라가 쓰고 용재 오닐이 연주하는 이 협주곡 2악장에는 한국 민요 아리랑이 흐른다. 이날 인터뷰에서 작곡가는 아리랑의 곡조를 정확하게 읊조렸다. 용재 오닐은 “이 협주곡에서 아리랑은 숨거나 변형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는 일본 전통 선율로 이어진다. 작곡가는 “한국계인 용재 오닐과 일본계인 나의 삶과 음악이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