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100주년 기념사업단 이주영(가운데) 대표가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소파 방정환 생가 터 인근에서 기념 행진에 참여하는 어린이들과 함께 웃고 있다. /박상훈 기자

“한 명 한 명 어린이가 태어나는 일에는 우주의 위대한 섭리가 있습니다. 부모의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죠. 아이들 출생이 줄어든 건 지구 위, 이 땅, 우리 집에 오는 귀한 손님이 끊어진 것입니다. 손님 맞이를 제대로 못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기 싫은 나라를 만든 것, 어른들의 가장 큰 죄 아닐까요.”

1922년 5월 1일 소파 방정환(1899~1931) 선생이 첫 번째 어린이날을 선포했다. 어린이날 100년을 맞는 올해, 한국은 세계 최악의 저출산 국가다. 최근 서울 합정동 사무실에서 만난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사업단’ 이주영(67) 대표는 “소중한 생명의 탄생을 경제 논리로 재단해선 안 된다. 어린이들이 저마다 한 몫의 사람으로, 소중하며 희망 있는 존재인 걸 느끼고 믿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어른들의 의무”라고 했다. 이 대표는 30여 년 교사로 살며 고(故) 이오덕 선생과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등을 함께했던 어린이 운동 원로. 어린이 글쓰기와 소파 방정환 선생에 관한 책도 여럿 썼다. 지금은 문학, 독서운동, 어린이극 등 우리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어린이날 100주년 문화사업을 이끌어 가는 기념사업단 대표를 맡고 있다.

이 대표는 “100년 전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선언<그래픽>은 1924년 당시 국제연맹이 채택한 ‘제네바 어린이 권리 선언’(제네바 선언)보다 1년 앞선 최초의 어린이 해방 선언으로 세계사적 의미가 크다”며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할 일”이라고 했다. 사실상 ‘어린이 보호’가 주였던 제네바 선언과 달리, 우리의 선언은 어린이를 온전히 ‘한 몫 인간’으로 대우하는 진일보한 내용이다. “1919년 3·1운동에 놀랐던 일제는 1922년 5월 1일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부터 훼방을 놓았어요. ‘조선 최초의 어린이날’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듬해 1923년 행사는 선전지만 20만 장을 나눠줄 만큼 행사 규모가 커졌고요.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잡지가 많을 땐 한 달에 10만 부 발행되고, 전국 각지의 소년회가 그걸 읽고 공부하면서 1925년 어린이날 행사엔 전국 어린이 30여만 명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기적처럼 뜨거운 호응이었지요.” 올해를 ‘어린이날 100주년’으로 꼽는 것도 1922년 5월 1일을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라 기록한 당시 신문 보도 등 사료에 근거한 것이다.

이 대표는 “방정환 선생의 노력을 기억한다면 지금 우리가 어린이를 대하는 인식과 태도도 성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선생은 식민지의 어린 백성으로 겹겹 억압을 받던 당대 어린이를 ‘조선의 가장 불쌍한 민중’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어린이에게 노동을 강제하지 말라 하셨고요. 혹시 지금 우리 교육은 어린이를 10년, 20년 뒤의 잠재적 노동력으로 바라보고 있진 않은가요. 이오덕 선생이 염려했던 ‘쇠창살에 가둬 알만 잘 낳는 암탉으로 만드는 교육’은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이 대표는 “방정환 선생은 100년 전 어린이 선언에서 ‘어린이를 내려다 보지 말고 올려다 보아 달라’ ‘충분히 잠자고 운동하게 해 달라’고 했다. 지금은 얼마나 변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도 했다. “학원 다니고 공부하느라 아이들 잠이 부족해요. 운동도 놀이도 돈 주고 하는 세상이 됐죠. 순수하게 아이들이 즐거워서 함께 놀면서 함께 살아가는 규칙을 익히는 게 놀이인데, 그 놀이마저 오염되고 있어요.”

이 대표는 동요가 사라져 가는 현실도 안타까워했다. “‘산토끼’는 독립 열망을 담았고, ‘고향의 봄’은 독립군도 즐겨 불렀어요.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들이 보내온 시를 당대 최고 작곡가들에게 맡겨 노래로 만든 뒤 잡지 ‘어린이’에 실어 보급했습니다. 방시혁씨가 동요를 만들어 방탄소년단이 부른 셈이랄까요. 지금 어린이들도 그들의 말로 지어진 동요가 필요해요. 보급 노력의 문제입니다.”

지금도 널리 불리는 동요에는 어린이들이 쓴 것이 많다. ‘고향의 봄’ 가사는 아동문학가 이원수가 13살 때인 1925년에 써서 이듬해 잡지 ‘어린이’ 시 문학 문예 공모전에 당선된 가사에 홍난파가 곡을 붙여 탄생했다. ‘오빠생각’ 역시 1925년 12살 소녀 최순애가 ‘어린이’ 지에 투고해 입선한 시에 훗날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낸 음악가 박태준이 곡을 붙인 것이다.

방정환 선생이 잡지 '어린이'에 실었던 동화에 새로 그림을 그려 펴낸 책 '4월 그믐날 밤'. 올해 어린이날 100주년을 기념해 세계 10국 언어로 번역돼 온라인으로 무료 공개된다. /길벗어린이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사업단에 참여한 문화예술인들은 어린이 문학주간, 한국 동화 100년 전시, 아동극과 오케스트라 공연, 국제 학술포럼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 중이다. 이 대표는 그중에서도 오는 7월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서울대 국문학과와 방정환연구소가 함께 열 ‘국제 방정환 학술 포럼’에 대한 기대가 크다. “포럼에 맞춰 어린이날의 기쁨을 판타지로 표현한 방정환 선생의 동화 ‘4월 그믐날 밤’을 10국 언어로 번역해 온라인으로 공개합니다. 길벗어린이 출판사가 큰 수고를 해줬어요.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사상이 세계로 알려질 큰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어린이 선언에는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와 젊은이에게 있지 않고 오직 어린이에게만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해 달라’는 문구도 있다. 지금 곱씹어도 의미가 깊고 놀라운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평생 어린이와 함께했지만 그는 “여전히 방정환 선생의 철학에서 배운다”고도 했다. “수필 ‘어린이 찬미’에서 ‘어린이는 복되다. 그 한없이 많이 가지고 온 복을 우리에게 나눠 준다’고 하셨어요. 가장 사람다운 마음, 그 본성이 어린이에게 있습니다. 잘 살피고 귀 기울여 잘 듣는 어른들만 그 복을 나눠 받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 주요 문화사업

100년 전 천도교 소년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소파 방정환과 소춘 김기전(1894~1948) 선생 등은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했었다.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사업단’은 이를 기념해 지난달 30일 개막 전야제 ‘4월 그믐날 밤’을 열고, 다음날인 1일에는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 행진 및 기념식 ‘모도(모두)가 봄이다’를 열었다. 다양한 분야의 100주년 기념 문화행사들이 이어진다.

○2022 어린이 문학주간 ‘아동문학 스테이지’

한국문화예술위 주최,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주관으로 5월 한 달 전국 40여 곳에서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아동문학 작가와 동인의 참여형 프로그램, 전국 문학관·도서관의 강연·체험 프로그램, 아동문학 전문서점의 낭독·강연·퍼포먼스 프로그램 등이다. 자세한 일정은 공식 블로그, (02)6263-1269, (02)711-0502

○방정환의 말:맛 창작소

아시테지 코리아(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한국본부)가 주관하는 어린이극 공연. 방정환 선생은 ‘토끼의 재판’(1923), ‘노래 주머니’(1923) 등 어린이를 위한 동화극을 직접 소개했다. 동화극을 1인극으로 제작해 6일까지 지역아동센터 등에서 공연한다. (02)745-5863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음악회 ‘어린이의 길동무 소파 방정환’

코리안 윈드 오케스트라(음악감독 이철웅)는 어린이날 5일 오후 3시 임진각 평화누리 대공연장에서 기념음악회를 연다.

○전시 ‘어린이날 100주년, 한국동화 100년’

어린이도서연구회는 서울 종로구 천도교 중앙대교당(안국역 5번 출구)에서 5일부터 26일까지 ‘어린이날 100주년, 한국동화 100년’ 전시를 연다. 한국동화 100년 실물도서 전시, 작은 공연이 이어지는 ‘방정환 이야기 극장’, 어린이들이 직접 뽑은 동화 소개와 체험형 놀이터 등이 마련된다.

○2022 국제 방정환 학술포럼 ‘21세기, 어린이라는 세계의 인간과 문학’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방정환연구소는 오는 7월 22~24일 국제 학술포럼을 함께 연다. ‘어린이 문화 예술과 평증주의’, ‘사회학적 관점에서 본 어린이’, ‘아동문학을 통해 살펴본 미래적 상상력’ 등 3개 섹션에서 5국 학자들이 참여해 15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