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연극론을 쓰고, 배우를 길러내며 근대극운동을 벌이던 서른 셋 현철.

‘내가 지금 우리 조선에는 연극이 없다고 하면 독자 제위는 나를 타매(唾罵·욕하다)하고 허언이라 하며 그 연례(演例)로 소위 구극(舊劇)에는 춘향가나 심청가를 들고 신파로는 임성구 김도산 김소랑을 들어 내게 육박할 줄 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던 극단을 가지고는 여러가지 극과학(劇科學)상으로 보아 연극이 아니고 유희이며 체조라고 한다.’(‘현당극담’, 조선일보 1921년1월24일)

일본 유학생 출신 현철(玄哲·1891~1965)이 100년 전 신문에 도발적 주장을 펼쳤다.’조선엔 연극도,극장도 없다’는 선언이었다. 판소리나 가면극, 꼭두각시 놀음 같은 전통극은 물론 당시 일본에서 들어와 성행하던 신파극까지 깡그리 부정했다. 특히 일본식 멜로드라마인 신파극을 연극에 대한 모독으로 여길 만큼 철저히 배격했다. 현철은 연극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민족의 자생력을 키우는 최선의 방편이라고 믿었다.

현당(玄堂)은 현철의 호이다. ‘현당극담’(玄堂劇談)은 현철이 쓰는 연극론이라는 뜻이다. 그는1921년 상반기 조선일보에 거의 매일같이 ‘현당극담’(1월24일~4월 21일·총 77회)을 썼다.

◇'현실 모르는 이론’ 반발 거세

신파극 진영의 반발도 만만찮았다. 조선 연극의 실상을 모르는 허황된 이론이라는 반박이 쏟아져 나왔다. 이세기는 매일신보(1921년2월28일~3월16일)에 ‘소위 현당극담’이란 비평을 썼다. 현철은 다시 ‘현당극담’에 ‘식후 한담’(食後閑談)이란 소재를 붙여 재반박에 나섰다. 조선인에겐 여전히 생소한, 연극을 둘러싼 대논쟁이 벌어졌다.

◇일본서 서구 리얼리즘 연극 배워

현철은 메이지대법과 재학중인 1913년 일본 신극의 선구자 시마무라 호게츠(島村抱月)가 이끌던 극단 예술좌(藝術座) 부속 연극학교에 들어가 4년간 연극을 공부했다. 톨스토이 ‘부활’ 투르게네프의 ‘그 전야’ 입센의 ‘바다의 부인’ 체홉의 ‘곰’같은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서구 리얼리즘 연극을 배웠다. 1917년 귀국했다가 상해로 건너가 중국 연극의 흐름을 익힌 뒤, 1920년 월간지 ‘개벽’ 학예부장으로 들어갔다. ‘개벽’은 현철의 합류로 연극론과 작품 번역을 엄청나게 쏟아냈다.

현철이 학예부장으로 몸담은 '개벽'에 연재하던 셰익스피어 희곡 '하믈레트'.현철은 1921년5월부터 1922년 12월까지 19회에 걸쳐 '하믈레트'를 연재했다. 셰익스피어 첫 희곡 완역이었다.

◇셰익스피어 희곡, 첫 완역한 ‘하믈레트

현철은 셰익스피어 희곡을 처음으로 완역한 ‘하믈레트’를 ‘개벽’에 연재했다. 1921년5월(11호)부터 1922년12월(30호)까지 19회에 걸친 장기 연재였다. 찰스 램의 이야기체 소설을 옮긴 게 아니라 쓰보우치 쇼요(坪內逍遥)의 ‘하무렛토’를 저본으로 한 희곡체 번역이었다. 현철의 ‘하믈레트’는 이듬해인 1923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나왔다. 현철은 투르게네프 소설을 각색한 쿠스야마 마사오의 희곡 ‘그 전야’를 번역한 ‘격야’(隔夜)도 개벽에 실었다.

현철이 유학 도중 연극으로 방향을 바꾼 이유는 연극이 민중 계몽과 사회 개발 수단으로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모든 것이 부실하고 빈약하고 쇠폐하며 공허한 조선 사회에서 민족의 문화계발을 통하여 조선 사회의 문명화를 이루고자’(‘문화사업의 급선무로 민중극을 제창하노라’, 개벽 제10호, 1921년4월)연극에 투신한 것이다.

◇조선배우학교 설립해 연극인 키워

현철은 1920년 2월 서울 서대문 근처에 직접 ‘예술학원’을 설립, 연극인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학원이 1년도 안돼 내분으로 문닫자 1923년 10월 동국문화협회를 세우고, 이듬해 12월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했다. ‘보통과’ ‘고등과’입학생 40여명에게 연극, 영화, 가극배우 양성을 목표로 연극사와 무용, 음악이론, 분장술까지 가르쳤다. 연극계에선 조선배우학교를 ‘연극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연극 교육기관’으로 기억한다.

1926년 9월엔 졸업생들로 입센의 ‘인형의 집’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배우학교 역시 배역 문제로 내분을 겪으면서 문을 닫았다. 1927년엔 조선극장을 맡아 운영했지만 역시 몇 개월만에 관뒀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일본 통한 근대의 도입

현철이 일본 작가들의 글을 베꼈다거나 참조했다는 비판은 내내 이어졌다. 일본유학파 출신인 이세기는 ‘세상이 다 아는, 모모 씨의 극에 대한 강의의 단편’을 가지고 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근 국내 학자들의 연구로 ‘희곡의 개요’ ‘연극과 오인(吾人)의 관계’ ‘연극과 교화’ ‘문화사업의 급선무로 민중극을 제창하노라’ 등 그의 대표적 연극론이 쓰보우치 쇼요 같은 일본 작가들의 저술을 참고했거나 발췌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을 통해 ‘근대’를 받아들이던 시대였다.

연극학자 유민영은 ‘(현철이)연극활동을 민족운동으로까지 끌어올린 것은 한국 근대극의 정신적 기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썼다. 하지만 ‘그가 당시대 상황이나 연극계, 그리고 대중의 수준을 거의 외면한 채 무작정 앞으로만 달려가려 했기 때문에 쉽게 좌절하고 또 쉽게 연극계를 떠났던 것’이라고 냉정하게 평가한다.

현철은 6년여만에 연극계를 떠났다. 화장품 제조에도 뛰어들었다 손을 뗐다. 해방 후에도 배우학원을 다시 열었으나 흐지부지됐다. 말년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에서 쓸쓸한 노후를 보냈다.

◇참고자료

정덕준, 玄哲 연구, 고려대 국문과 석사논문, 1976

권오숙, ‘한국 최초의 셰익스피어 완역본 현철의 ‘하믈레트’ 연구—현철의 근대극 운동과 연극론을 바탕으로 한 연극사적, 셰익스피어 수용사적 연구’, 셰익스피어 리뷰 57~1, 2021 봄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출판부,1996

신정옥, 셰익스피어 한국에 오다-셰익스피어의 한국수용과정연구, 백산출판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