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감독이 1961년 메가폰을 잡은 영화 '상록수'. 신영균이 동혁, 최은희가 영신역을 맡았다.영화배우,감독 출신인 심훈은 생전에 '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애쓰다 작품 발표 이듬해인 1936년 9월 장티프스로 갑작스레 숨졌다. 서른다섯, 때이른 죽음이었다/한국영상자료원

‘우리가 모든 조선 영화를 (불)살러 버린다면 이 영화를 남겨 놓는 데에 과히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印象記’, 조선일보 1929년1월27일)

만문만화로 이름난 안석주(1901~1950)는 1929년 새해 벽두 ‘필화’를 겪었다. 연초 영화를 리뷰하면서 극찬을 했다가 다른 영화감독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은 것이다. 사흘뒤 신문에서 그는 이 표현을 공개취소해야 했다. ‘’먼동이 틀 때’에 대한 문구는 비록 인상기라 하더라도 다른 모든 영화에 대해 영향이 있을 것을 염려하야 이에 취소한다’(조선일보 1929년1월30일)

몇 년 뒤 영화감독까지 한 안석주가 극찬한 ‘먼동이 틀 때’는 심훈(1901~1936)이 1927년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한 영화였다. 훗날 ‘상록수’로 유명해진 그 심훈이다. 영화평론가 서광제도 ‘촬영과 카메라워크에 있어서도 조선에서 그 이상 갈 작품을 없을 것’이라고 쓸 만큼 인정을 받았다. ‘먼동이 틀때’는 원래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으로 촬영을 시작했는데, 총독부가 암울한 현실을 떠올린다며 제동을 거는 바람에 제목을 반대로 바꿔야 했다.

영화 '장한몽'을 소개하는 조선일보 1926년 3월1일자 기사. 심훈이 신태식이라는 가명으로 이수일을 연기했다.

심훈은 1926년 이경손 감독의 영화 ‘장한몽’에서 여주인공 심순애의 상대역 이수일을 연기한 배우 출신이라 더욱 주목을 받았다. 조선인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장한몽’은 일본 소설 ‘금색야차’(金色夜叉)를 번안한 조중환 소설로 신파극의 대명사였다. 근엄한 얼굴의 심훈이 망토를 걸친 채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더냐!’하고 일갈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무성영화 시대라 심훈의 육성 대신 변사가 구성지게 대사를 읊었을 것이다.

1927년 10월26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먼동이 틀때’는 관객 5만명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거액의 제작비(3000원)를 들인 영화치고는 재미를 못 봤던 모양이다. 영화사는 망했고 심훈은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영화배우, 감독을 거친 심훈은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들어와 영화 기사와 리뷰를 활발히 썼다. 1931년 퇴사한 이후 고향에 내려가 쓴 '상록수'가 동아일보 현상공모에 당선됐다.

◇조선일보 기자로 영화평, 기획 기사 써내

심훈은 연극과 무용 기사도 썼지만 주 관심은 영화였다. 서구와 조선의 영화를 소개하고 비평하는 기사를 활발하게 다뤘다. 1929년 1월 쓴 ‘조선영화총관’이 대표적이다. ‘조선에 활동사진이라는 것이 맨처음 수입되기는 1897년, 즉 지금으로부터 33년전에 이현(남산정)에 있던 ‘본정좌’(本町座)라는 조그만 송판쪽 빠라크 속에서 일본인 거류민들을 위해서 실사(實寫) 몇권을 가져다 놀린 것으로 효시를 삼는다’(조선영화총관 1, 1929년1월1일) 원각사를 거쳐 첫 상설영화관인 일본인 경영 ‘고등연예관’(高等演藝館)을 소개했다. ‘한국영화사’의 효시쯤 될 것같다.

'먼동이 틀 때' 촬영 시작을 알린 조선일보 1927년 9월3일자 기사. 사진은 주연 신일선과 한병룡.

◇'사기 횡령해서라도 촬영장부터 만들어야’

관중의 한사람으로’(1928년 11월 17~18, 20일)는 흥행업자와 해설자(변사), 영화계의 모순을 매섭게 비판하면서 반성을 촉구하는 기획이었다. ‘조선서 흥행이란 영업은 양복 장사나 구두 장사 모양으로 원료를 한 가지도 우리 손으로 제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업자는 직공들의 수공값에서 겨우 몇할을 얹어가지고 남의 노력을 긁어먹게 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흥행자는 제작자와 배급업자의 중간에 끼어 관중에게서 사진을 소개한 수수료 즉 심부름값을 받아먹는데 지나지 못한다.’

선전물만 믿지말고 시사 한번쯤은 미리 보고 상영시키라고 흥행업자를 매섭게 나무란다. 영화계에 대해서도 ‘조선 영화의 역사가 근 10년을 바라보건만 이날까지도 참말로 영화계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다고는 누구나 말하지 못할 것’이라며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든지 사기횡령을 해서라도 촬영장 하나는 지어놓고 카메라 백개와 아크등 몇 대라도 장만해놓고 나서 빈약하나마 정식으로 촬영을 개시하잔 말이다. 적어도 본격식으로 일을 하고 나서 성패간 성적을 말할 수있을 것이 아닌가’라고 토로했다. 촬영 카메라와 조명, 촬영장도 없이 조악하게 영화를 만드는 무모한 현실을 들춰내고 있다.

심훈이 1930년 10월29일 연재를 시작한 소설 '동방의 애인' 연재를 중단한다는 조선일보 1930년12월 13일자 사고. '불온하다'는 총독부 검열 때문이었다.

◇총독부 검열로 연재소설 중단

심훈은 조선일보에 소설을 연재하다 두 번 모두 일제 검열에 걸려 중단됐다. 첫번째는 기자로 재직중인 1930년 10월29일 시작한 ‘동방의 애인’. 그해 12월10일까지 39회 연재됐으나, 12월13일 ‘사정에 의하여 중지케 되었사오며’란 짤막한 안내와 함께 중단됐다.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제 검열에 걸린 것이다. 두 번째는 1931년 조선일보를 퇴직하고, 경성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다가 3개월만에 사상 문제로 추방당한 뒤로 보인다. 그해 8월 16일부터 연재한 ‘불사조’다. 이 작품 역시 검열에 걸려 1932년 2월29일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그해 9월 저항시 ‘그날이 오면’이 수록된 ‘심훈 시가집’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또 검열에 걸려 무산됐다.

◇'상록수’와 문자보급운동

심훈은 1932년 본가가 있는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가 지냈다. 이듬해 8월 여운형이 사장인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부임했지만, 1934년 1월 그만두고 다시 낙향했다. 그리고 쓴 게 ‘상록수’다. 상록수는 조선일보가 1929년 시작한 ‘문자보급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첫 부분이 문자보급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을 위로하는 다과회가 ‘00일보사’대강당에서 열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이 처음 만나는 곳이다. 조선일보 기자로서 문자보급운동의 전 과정을 지켜본 심훈의 체험이 담겼다.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현상소설에 당선됐다. 심훈은 1924년 동아일보에서 처음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날이 오면’ ‘오오 조선의 男兒여’

심훈은 3·1운동 11주년을 맞은 1930년3월1일 시 ‘그날이 오면’을 썼다.(’심훈시가집’외 351쪽, 글누림출판사, 2016) 조선일보 기자 시절이었다. 경성제1고보생으로 덕수궁 앞 만세시위에 앞장서다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한 기억이 생생했을 것이다. 심훈은 그해 경성지방법원에서 11월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8개월 만에 출옥했다. 학교는 퇴학당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그날이 오면’ 1연)

암울한 시대, 독립과 해방을 갈구하는 외침이었다. 심훈은 ‘그날’을 보지못하고 세상을 떴다. 손기정·남승룡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를 축하하는 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발표(1936년 8월11일 조선중앙일보)한 지 한 달 남짓 후였다. 소설 ‘상록수’ 출판을 준비하기 위해 경성에 올라와 한성도서 2층에서 지내다 장티프스에 걸려 9월16일 별세했다. 느닷없는 죽음이었다.

‘그날이 오면’은 해방 4년 후인 1949년 나온 유고집 제목이 됐다. 심훈은 200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참고자료

김종욱·박정희 엮음, 심훈 시가집 외,글누림, 2016

김윤식·유종호 외, 근대문학, 갈림길에 선 작가들, 민음사, 2004

조선일보 사료연구실, 조선일보 사람들, 랜덤하우스 중앙,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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