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한 명탐정 에르퀼 푸아로(케네스 브래너)는 영화 ‘나일강의 죽음’에서도 살인 속에 도사린 음모를 명쾌하게 풀어낸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살인범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못 나갑니다.”

셜록 홈스와 더불어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정으로 꼽히는 ‘에르퀼 푸아로’(케네스 브래너). 그는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뒤 이렇게 단언한다. 9일 개봉하는 ‘나일강의 죽음’은 애거사 크리스티(1890~1976)의 1937년 동명(同名)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다. 2017년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 이어서 4년여 만의 후속 편. 이번에는 대륙 횡단 열차에서 호화 유람선으로 살인 무대를 옮겼다.

영화를 연출하고 직접 푸아로 역을 연기한 브래너(61)는 ‘제2의 로런스 올리비에’로 불렸던 명배우.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의 연극 배우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셰익스피어 원작 영화 ‘헨리 5세’에서 각색·연출·주연까지 도맡아서 주목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9세. 그 뒤에도 ‘헛소동’(1993년) ‘햄릿’(1996년)과 ‘당신 좋으실 대로’(2006년)까지 셰익스피어 작품을 꾸준하게 영화화했다. 셰익스피어에서 크리스티로 그의 관심사가 변모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브래너는 외신 인터뷰에서 “범죄를 향한 욕망은 위험할 만큼 섹시하다. 크리스티는 감정적 혼란과 위험한 범행으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영화든 소설이든 진범을 알고 나면 재미가 반감하는 점은 추리물의 약점. 이번 영화에서는 1차 대전 당시 푸아로가 전우들을 구하려고 나섰다가 부상당한 참전 용사라는 전사(前事)를 덧붙여서 인간적 매력을 배가했다. 푸아로의 상징인 멋진 콧수염 이면에는 전쟁의 비극적 상처가 드리우고 있는 셈이다. 브래너는 벨기에 출신인 푸아로가 불어에는 능통하지만 영어에는 다소 서툴다는 면모까지 명확하게 구현한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영화 '나일 강의 죽음'

추리극에서는 주인공인 탐정 외에는 모든 등장인물이 평등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거나 용의자거나. 여기서 흡사 실내악의 앙상블 같은 묘미가 생겨난다. 이 시리즈에서도 브래너의 주연 못지않게 화제가 되는 것이 초호화 출연진이다. 조니 뎁, 미셸 파이퍼, 주디 덴치 등이 열연했던 전편에 이어서 이번에는 ‘원더 우먼’ 시리즈의 갈 가도트와 영화 ‘벅시’ ‘러브 어페어’의 애넷 베닝이 유람선 탑승객으로 동승했다.

특히 약혼자를 사이에 두고 절친에서 연적(戀敵)으로 전락하는 ‘리넷’(갈 가도트)과 ‘재클린’(에마 매키)의 갈등을 통해서 치정극 성격을 강조했다. ‘원더 우먼’의 가도트가 남의 약혼자를 빼앗는 부유한 상속녀,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를 통해서 이름을 알린 매키가 약혼자를 빼앗기는 비운의 여인 재클린 역을 각각 맡았다. 둘의 대립은 극 전체를 끌고 가는 동력이기도 하다.

21세기는 온몸을 던지는 액션을 불사하면서도 말끔하게 사건을 해결하는 ‘문무(文武) 겸비’ 주인공 시대다. 아무래도 크리스티의 추리극은 고색창연하고 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유려한 이집트의 풍광과 화려한 출연진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를 따라다니는 취약점이기도 하다. 과연 초능력 영웅과 액션 스타들이 넘치는 극장가에서도 푸아로의 명쾌한 추리는 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