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4일 서울 용산cgv 아이파크몰 광고판 모습. 외화가 대부분의 상영관을 차지하고 있다. / 김지호 기자

‘베놈2′의 살생 본능, ‘듄’의 모래 바람, ‘007′의 권총 세례, ‘라스트 듀얼’의 중세 결투까지. 올가을 한국 극장가는 온통 외화(外畵) 일색이다. 25일 영화진흥위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이 영화들이 차례로 흥행 상위 1~4위를 차지했다. 향후 흥행의 선행지표인 예매율의 경우에는 아예 외화들이 상위 1~9위를 싹쓸이했다. 반면 한국 영화는 지난 추석 개봉작인 ‘보이스’와 ‘기적’으로 한 달째 근근이 버티는 중이다. 그야말로 외국 영화는 화려하고 한국 영화는 빈약한 극장가의 ‘외화내빈(外華內貧)’이다.

007 노타임투다이 1

‘위드 코로나’와 함께 미국·유럽 극장가가 최근 회복세로 돌아선 것이 ‘외화 강세’의 근본 원인이다. 세계 극장가 부활의 신호탄은 007이 쏘아 올렸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최근 전 세계 개봉 이후 4억7400만달러(약 5500억원)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7억1000만달러)에 이어서 올해 할리우드 개봉작 가운데 2위. 영국 일간 가디언은 “제임스 본드 영화가 박스 오피스 기록을 박살냈다(smashed)”고 표현했다.

이터널스

코로나 이후 침체를 거듭하던 세계 극장가의 반등 조짐에 할리우드는 연일 신작 상영 소식을 쏟아낸다. 마동석이 초능력 영웅으로 변신하는 ‘이터널스’(11월 3일 국내 개봉),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매트릭스 4편’(이하 12월 개봉)과 ‘고스트버스터즈’ ‘스파이더맨’의 후속편까지. 연말까지 줄줄이 해외 대작의 개봉 일정이 잡혀 있다. 코로나 사태로 창고에 묵혀 놓았던 블록버스터(Blockbuster)들을 한꺼번에 방출할 기세다.

할리우드의 열기에 비하면 한국 영화는 아직도 혹한기다. 윤계상 주연의 ‘유체이탈자’, 전종서·손석구 주연의 ‘연애 빠진 로맨스’, 류승룡·오나라 주연의 ‘장르만 로맨스’ 등 세 편이 다음 달 개봉 예정일 뿐, 크리스마스와 연말 상영작은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 극장 관계자는 “올해는 한국 영화 신작이 워낙 적어서 일부 상영관은 ‘스크린 쿼터’(한국 영화 의무 상영 일수·73일)를 맞추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2021년 10월 24일 서울 용산cgv 아이파크몰 광고판 모습. 외화가 대부분의 상영관을 차지하고 있다. / 김지호 기자

극장가 최대 성수기로 꼽히는 여름 흥행 부진이 한국 개봉작 기근의 직접적 원인이다. ‘모가디슈’(360만명) ‘싱크홀’(210만명) ‘인질’(163만명) 등 올 여름 개봉작 세 편을 합쳐도 ‘1000만 관객’에 못 미쳤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그린 뮤지컬 영화 ‘영웅’, 1947년 서윤복이 우승한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다룬 ‘보스턴 1947′ 같은 같은 대작들이 코로나 여파로 개봉일을 잡지 못하고 있다. 영화 시장 분석가 김형호씨는 “수출보다는 내수 시장 의존도가 높고 극장 매출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 영화의 구조적 취약점이 코로나를 계기로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극장가 국적별 관객 점유율

통계에서도 극장가의 ‘외화내빈’은 확인된다. 영화진흥위 통합전산망이 도입된 2004년 이후 한국 영화는 2008년을 제외하면 매년 국적별 관객 점유율에서 할리우드에 선두 자리를 내준 적이 없었다<그래픽>. ‘아이언맨’ ‘다크 나이트’ ‘미이라 3편’ 같은 외화 대작들이 쏟아졌던 2008년이 유일한 예외였다. 코로나 여파로 할리우드 신작이 드물었던 지난해에는 한국 영화의 관객 점유율이 68%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올해는 상황이 정반대다. 신작 기근 탓에 올해 한국 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34.7%(10월 현재)까지 떨어진 반면, 미국 영화(54.2%)는 훌쩍 절반을 넘어섰다. 이대로면 13년 만에 미국 영화에 관객 점유율 1위를 다시 내어줄 판이다. 김형호씨는 “영화들이 2~3년씩 개봉을 미룰수록 흥행 불확실성이나 금융 부담 등도 커지게 마련”이라며 “중소형 작품을 포함해 다양한 지원책으로 극장 개봉의 물꼬를 터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