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광릉 국립수목원에 다녀왔습니다. 남녘에서 상사화 사진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수목원 지인에게 상사화가 피면 알려달라고 부탁드렸는데, 드디어 피기 시작했다는 연락이 온 것입니다. 수목원 만병초원과 비비추원 근처 등 두세 곳에서 막 핀 상사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연분홍 꽃 색깔이 기대 이상으로 고와 뙤약볕에 1시간 이상 차를 몰고 간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막 피기 시작한 국립수목원 상사화.

상사화는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때는 꽃을 볼 수 없는 특이한 식물입니다. 봄에는 잎만 나와 6~7월쯤 마른 다음 8월쯤 꽃대가 올라와 연분홍색 꽃이 핍니다. 그래서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해 그리워한다고 이름이 상사화(相思花)입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는 상사화는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우리가 보는 상사화들은 사람들이 알뿌리를 쪼개 심어준 것입니다. 여러가지로 마음을 짠하게 하는 상사화 스토리입니다.

국립수목원 상사화.

이금이의 장편동화 ‘너도 하늘말나리야’에는 상사화가 참 인상적으로 나옵니다. 이 장편동화는 미르, 소희, 바우 등 세 결손 가정 아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며 커가는 이야기입니다. 이중 바우는 어려서 엄마를 잃고 ‘선택적 함구증’에 걸린 아이인데, 바우 아버지는 엄마 산소 옆에 상사화를 심었습니다. 바우가 자기 가족이 한 몸이지만 만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상사화의 꽃과 잎 같다고 생각합니다.

‘너도 하늘말나리야’는 1999년 나온 책인데, 이미 성장소설의 고전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청소년용 동화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잔잔한 감동을 받을 수 있고, 미르·소희·바우 등 주요 인물들을 각각 꽃에 비유하는 등 꽃도 많이 나옵니다.

상사화가 질 무렵, 그러니까 초가을에 상사화 비슷한 모양에 진한 붉은색으로 피는 꽃이 있습니다. 이 꽃은 석산으로, 꽃무릇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일부에서 상사화라고도 하지만 상사화가 따로 있으니 맞지 않겠습니다.

초가을에 피는 석산(꽃무릇).

석산도 잎과 꽃이 동시에 피지 않는 점은 상사화와 같습니다. 상사화는 봄에 새잎이 나지만, 석산은 가을에 새잎이 돋아나 겨울을 납니다. 석산은 사찰 주변에 많이 심는데, 전남 영광 불갑사, 전북 고창 선운사 등이 석산 군락으로 유명합니다. 탱화를 제작할 때 석산 알뿌리 전분을 방부제로 쓴다고 합니다. 석산도 상사화와 마찬가지로 꽃이 화려하지만 결실을 못합니다.

상사화 비슷한 꽃이 몇 개 더 있습니다. 전북 정읍 내장산에 가면 상사화 비슷한 꽃을 엄청 많이 심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사화보다 좀 작은 꽃대에 피는 주황색 꽃이 예쁩니다. 이 꽃은 백양꽃으로, 9월이 제철입니다. 이 식물을 처음 발견한 곳이 백양사 주변이라고 백양꽃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우리나라 특산식물이기도 합니다.

내장산 백양꽃.

제주도에 가면 백양꽃보다 주황색이 연하면서 상사화 비슷한 꽃을 볼 수 있는데 이 꽃은 제주상사화입니다. 꽃색이 더 연한데다 화피 주맥에 붉은선이 있는 것도 차이점입니다.

위도상사화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전북 위도 특산으로 꽃이 노란빛이 도는 흰색으로 피는 상사화 종류입니다.

제주상사화. /야사모 산방
위도상사화.

또 진한 노란색이고 화피 가장자리가 파도처럼 구불거리는 진노랑상사화, 꽃이 연한 노란색인 붉노랑상사화도 있습니다. 이 두 노란색 계통 상사화를 개상사화라고도 부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진노랑상사화와 붉노랑상사화 이름을 바꾸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소사 진노랑상사화.


붉노랑상사화.

고 박완서 작가가 말년을 보낸 구리 아치울마을 노란집에도 상사화가 자랐습니다. 작가의 맏딸 호원숙씨는 책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에서 “(나는 노란집 마당에 핀 상사화) 꽃을 보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엄마를 부른다”며 “하나의 꽃대에서 넉넉하게 대여섯 송이가 피어나는 다산성까지도 엄마를 생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역시 상사화는 그리움의 꽃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