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우리 밭으로 가는 길가엔 여름마다 노란 원추리가 피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야생화하면 떠오르는 꽃이 원추리였습니다. 짓궂기만 했던 그 시절에도 원추리는 한번도 꽃을 꺾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요즘 산은 물론 서울 도심 화단에서도 노란색 원추리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원추리의 계절이 온 겁니다.
이 꽃을 보면 2016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소설 ‘채식주의자’도 떠오릅니다. 이 소설은 육식을 거부하다 나중에는 자신이 식물로 변해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영혜 이야기입니다. 3부 연작 중 2부 ‘몽고 반점’에서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부는 처제 영혜에게 비디오 작품 모델을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허락을 받은 형부는 처제의 몸에 꽃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번에는 노랑과 흰빛으로 그녀의 쇄골부터 가슴까지 커다란 꽃송이를 그렸다. 등 쪽이 밤의 꽃이었다면, 가슴 쪽은 찬란한 한낮의 꽃들이었다. 주황색 원추리는 오목한 배에 피어났고, 허벅지로는 크고 작은 황금빛 꽃잎들이 분분히 떨어져내렸다.>
이처럼 처제의 몸에 그린 꽃 중 하나로 원추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주황색 원추리’라고 했으니 왕원추리를 그린 것 같습니다. 소설에서 특정 꽃이 의미를 갖는 것 같지는 않지만 원추리가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사실입니다.
원추리는 우리 산과 들에서 흔하게 자생하는 백합과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줄기 없이 잎이 아래쪽에서부터 서로 포개져 부채살처럼 올라오면서 양쪽으로 퍼지고, 그 사이에서 긴 꽃대가 올라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꽃송이를 매답니다.
꽃은 6월부터 시작해 8월까지 볼 수 있는데, 아름다운 꽃과 오랫동안 볼 수 있는 장점 때문에 관상용으로도 인기가 높습니다. 그래서 요즘 도심 공원이나 길가 화단에서도 원추리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원추리도 종류가 많지만 4가지 정도만 기억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먼저 아침에 진한 노란색 꽃이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것이 그냥 원추리입니다(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 그냥 원추리를 종에서 빼고 사람들이 흔히 원추리로 아는 종 이름(국명)을 백운산원추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렇더라도 일반인들은 그냥 원추리로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꽃이 저녁에 피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지고 꽃색이 좀 연한 원추리도 있는데 대부분 노랑원추리입니다. 그러니까 노랑원추리는 박꽃·달맞이꽃처럼 밤에 피는 꽃입니다.
도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꽃이 좀 크고 주황색 꽃이 피는 왕원추리입니다. 왕원추리는 중국 원산으로 관상용으로 들여온 것인데, 한강시민공원 등 넓은 터에 대량으로 심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원추리는 꽃이 화려하지만 결실을 못해 덩이뿌리를 갈라 심어주는 방법으로 번식시키고 있습니다. 왕원추리의 겹꽃이 겹왕원추리입니다. 또 화단에 키가 20~30cm로 작은 재배종 스텔라원추리(왜성원추리, 사계절원추리)도 많이 심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추리라는 이름 유래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중국 이름인 훤초(萱草)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있는 것 같습니다. ‘훤초’가 ‘원초’로 바뀌고 접미사 ‘리’가 붙으면서 ‘원추리’가 됐다는 것입니다. 민간에서는 꽃을 말려 몸에 지니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득남초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이 속설은 원추리 꽃봉오리가 아기의 고추를 닮았기 때문에 생겼을 것입니다. 또 근심을 잊게 할 만큼 아름다운 꽃이라고 망우초(忘憂草)라고도 불렀습니다. 노란색 원추리를 만나면 꽃을 감상하면서 근심도 잊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