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개봉한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Those Who Wish Me Dead)은 시작부터 화끈합니다. 공수 소방대 팀장 한나(앤젤리나 졸리)는 바람의 방향을 잘못 읽은 탓에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산불의 한 가운데 대원들과 함께 갇힙니다. 도망치려던 동료는 몸에 불이 붙어 구르고, 멀리서 어린 소년 셋이 살려달라며 뛰어오지만 구하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자연의 압도적 힘 앞에 설 때, 사람은 작고 미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 좌절의 트라우마, 한계의 감각이 악몽으로 한나의 밤을 흔들어 놓습니다. 눈물로 범벅이 된 한나의 얼굴, 자해 흉터가 가득한 그녀의 손과 팔이 드러내는 먹먹한 슬픔의 정서는 이 영화를 만든 테일러 셰리던 감독이 작품마다 꾹꾹 눌러 찍어 넣는 그의 인장과 같습니다.

셰리던은 ‘시카리오’(Sicario·2015)와 ‘로스트 인 더스트’(Hell or High Water·2016)의 각본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던 배우 출신 감독입니다. 이어 2017년에는 직접 감독을 맡은 ‘윈드 리버’(Wind River)로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감독상을 받았지요.

‘시카리오’에선 마약 카르텔이 학살한 사람들을 집 벽에 묻고 시멘트를 바르는 미국-멕시코 국경지대가, ‘로스트 인 더스트’에선 은행 빚에 어머니의 농장을 뺏기게 된 형제의 텍사스 황무지가, ‘윈드 리버’에선 ‘인디언 보호구역’의 주박에 묶인 욕망들이 충돌하는 와이오밍의 설원이 배경으로 바뀌어갈 뿐, 셰리던이 쓴 시나리오는 거울에 비친 한 사람의 얼굴처럼 닮았습니다. 그가 빚어낸 세상 안에는 늘 비애로 가득 찬 약육강식의 세계가 있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실존의 한계가 있으며, 그 고통을 껴안고 살면서도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가 존경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의 암울한 비장미와, 마이클 만 영화가 가진 건조한 폭력의 아름다움이 배어나옵니다. 셰리던 감독의 영화 세 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 ‘로스트 인 더스트’(Hell or High Water·2016)

: 그들이 생존해온 대지만큼 거친 텍사스의 사내들

서부 텍사스, 실직 상태에 이혼까지 당한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에게 교도소에서 출소한 형 태너(벤 포스터)가 찾아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평생 지키려 애썼던 농장은 주말까지 4만3000달러의 대출금을 갚지 못하면 텍사스 미들랜즈 은행에 압류당할 상황. 형제는 이 은행 지점들을 털어 돈을 갚을 계획을 세운 뒤 연쇄 강도 행각을 벌이는데, 곧 은퇴를 앞둔 보안관 마커스(제프 브리지스)가 이들을 추적해 옵니다.

텍사스인들은 그들이 생존해온 대지만큼이나 거칩니다. 은행강도 뉴스를 전하는 TV앵커의 목소리, 경찰차의 번쩍이는 경광등과 사이렌 소리, 총격전…. 말을 타고 평원을 내달리는 대신 미국산 차를 타고 골목과 도로를 질주하지만, 이 영화는 서부극처럼 황량한 모래바람을 일으킵니다. 어둠 속 인물의 음영을 비추는 스팟 조명 대신 황무지의 뜨거운 햇빛 아래 맨 몸의 캐릭터를 던져 넣는데도 느와르의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영화의 원제 ‘Hell or high water’는 영어 결혼 선서에서 우리말의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쯤에 해당하는 관용구입니다. 각본가 셰리던은 불황 속에 일자리를 잃고 은행에 집을 뺏기는 사람들의 절망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영화는 끝끝내 희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 위의 할아버지도 가난했어요. 가난은 전염병 같아서 당신 곁 모든 사람을 전염시키지요. 하지만 더 이상은 안돼요. 내 아이들에겐 더더욱.” 집으로 찾아온 보안관 ‘마커스’에게 ‘토비’는 말합니다. 서부 개척시대는 지나간 과거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타인의 가슴에 총알을 박아 넣어야 하는 생존의 법칙은 변하지 않은 겁니다. 텍사스의 남자들은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그저 거기 서서 무표정하게 버틸 뿐. 황무지에 지는 석양, 긴 그림자가 가슴 먹먹합니다.

◇ ‘윈드 리버’(Wind River·2017)

: “지쳤어, 이 삶을 사는데 너무 지쳤어…”

미국 와이오밍의 윈드 리버 원주민 보호구역. 겨울이면 영하 20도 강추위에 눈보라가 쉼없이 몰아치는 곳입니다. 코요테같은 포식 동물을 쏴 죽여 가축을 보호하는 게 직업인 코리(제러미 레너)가 젊은 원주민 여성의 유혈 낭자한 시체를 발견합니다. 죽은 여자는 나탈리. 강하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신참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을 도와 살인범을 쫓는 동안, 코리와 희생자 가족 사이 얽힌 아픔, 영역을 잃은 야생동물처럼 보호구역 안에 갇힌 아메리카 원주민의 절망, 사건 뒤에 숨겨진 인간 본성의 추악한 비밀이 조금씩 민낯을 드러냅니다.

도입부에서 영화는 설원 위 검푸른 밤하늘에 퍼렇게 날을 벼린 칼같은 달의 이미지로 관객을 압도합니다. 눈 밭을 맨발로 뛰어 어디론가 도망치던 여자는 두어번 쓰러진 뒤 피를 토하고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합니다. 이 아름답고도 잔혹한 풍경의 패러독스는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비애의 정조 속으로 관객을 빨아들입니다.

원주민 보호구역 윈드 리버의 설원에 쌓인 것은 단순한 눈을 넘어, 가장 진보된 사회라는 미국의 번영이 딛고 선 비극의 총합을 드러내는 알레고리처럼 보입니다. 조상들이 가졌던 것을 모두 빼앗긴 원주민들의 대물림되는 빈곤, 침묵과 눈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권태, 손에 잡힐 듯 하다가 싸락눈처럼 부서져 내리는 희망, 끝없는 좌절 같은 것들이지요.

그 알레고리의 순환 안에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사회적 굴레, 사람이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와 실존의 한계들이 엮여듭니다. 죽은 나탈리의 동생, 대학도 나오고 군대도 다녀왔지만 결국 원주민 보호구역 안의 마약 중독자가 된 남자는 코리에게 말합니다. “나라고 이렇게 살고 싶었겠어요. 너무 화가 나서, 온 세상과 싸우고 싶었다고요.” 코리는 답하지요. “알아. 나도 그랬어. 그래서 난 결심했지.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는 없으니 나 자신과 싸우기로.”

딸 나탈리의 사망 소식을 전할 때 아버지의 대사는 이 영화 전체가 가진 절망의 정조를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난 너무 지쳤어 코리. 이 삶을 사는 데 너무 지쳤어.” 얼음에 새긴 조각처럼 빛나는 장면과 대사들을 통해, 영화는 단순한 살인 미스터리를 넘어 인간과 세계의 비극성에 관한 은유로 나아갑니다.

◇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Those Who Wish Me Dead·2021)

: “아빤 옳은 일을 했어. 그래도 미안하다, 아들.”

아빠는 아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범죄과학 회계사(forensic accountant)’라고 말합니다. 어느 거대기업의 회계 부정을 발견한 아빠. 범죄 정보를 함께 공유한 지방 검사장은 집을 통째로 폭파하는 방식으로 암살당합니다. 암살자들이 곧 자신과 가족도 노릴 것을 직감한 아빠는 아들을 데리고 죽은 아내의 남자 형제가 보안관으로 일하며 서바이벌 학교를 운영하는 곳, 플로리다 북부의 거대한 숲 속 마을로 도주하기 시작합니다. 차를 타고 가며 아빠는 줄곧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아들이 묻지요. “아빤 옳은 일을 했잖아요. 그렇죠?” 아빠는 다시 한 번 말합니다. “그럼. 그래도 미안하다, 아들.”

아빠는 곧 킬러들에게 살해당하고, 아들은 아빠가 남긴 기업 회계 범죄의 진실이 담긴 메모를 전하기 위해 혼자서 숲 속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공수 소방대원 한나를 만나지요. 산불에 굴복해 불길에 휩싸인 소년들을 구하지 못했던 과거의 죄책감에 시달려온 한나는 소년을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킬러들이 두 사람의 뒤를 쫓아오고, 도망치는 그들의 앞을 거대한 산불이 막아섭니다. 이제 두 사람이 믿을 수 있는 건 서로 뿐,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합니다.

이 영화 속 산불이 뿜어내는 화마(火魔)는 압도적입니다. 산불이 산비탈을 휩쓸며 한나와 소년을 향해 번져오는 모습은 마치 핵폭풍 같습니다. 이 생존이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인간의 삶이라는 이 총체적 부조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결국 그저 그렇게 움직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은.

셰리던 감독의 영화들이 오랜 시간 뒤에도 기억된다면, 그건 그 미래의 시간에도 똑같은 좌절이, 부서진 희망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인간의 부조리함과 먹고 먹히는 사회의 잔혹함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디선가 또 다른 열여덟 살 나탈리가 윈드 리버의 영하 20도 눈밭 위를 맨발로 6마일 이상 뛰어 달아나다, 마침내 얼어붙은 자기 폐 안의 피가 터져 질식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다른 소년과 여인이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플로리다의 산불과 그보다 더 잔혹한 암살자의 추적을 피해 사신(死神)의 곁을 스쳐 달아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테일러 셰리던 감독이 만들어낸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