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포분자'. /에이썸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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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 전화 한 통으로 아내가 집을 나갔다. 소설을 쓰는 아내 ‘주울분’은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권태를 느낀다. 의사인 남편 ‘이립중’은 슬럼프에 빠진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고 직장에서의 승진에만 집착한다. 두 부부의 지루한 일상에 장난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별것 아닌 우연들을 층층이 쌓아올려 거대한 도시 속 파편화된 개인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버린다.

대만 영화감독 에드워드 양(1947~2007)의 1986년 작 ‘공포분자’ 가 리마스터링을 거쳐 34년 만에 국내에 개봉했다. ‘타이페이 스토리’,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함께 ‘타이베이 3부작’으로 불린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후 인터뷰에서 “대만의 허우샤오셴,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좋아했다”고 밝혔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다큐멘터리 연출 시절 에드워드 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르몽드는 “현대 영화계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 극찬했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왓챠에서 바로보기

영화 '공포분자'. /에이썸픽쳐스

1980년대 대만에선 공산당에 맞서는 선전 영화에서 벗어나 ‘뉴 웨이브’라 불리는 새로운 흐름의 영화들이 등장했다. 빠른 경제 성장 속에서 현대 도시인이 겪는 우울과 불안을 들여다보는 영화들이었다. 미국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컴퓨터 시스템 디자이너로 일했던 에드워드 양은 대만으로 돌아와 ‘뉴 웨이브’ 흐름을 주도했다.

‘공포분자’ 속 네 명의 주인공은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을 견디는 서로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남편 이립중은 성공이 인생의 전부라 믿고, 동료를 모함해가면서까지 승진에 집착한다. 소설가 아내는 슬럼프에 빠져 소설을 써내지 못하고 옛 애인과 만나 불륜을 저지른다. 소녀는 성매매하려는 남자들을 꼬여 돈을 훔치고, 재미로 여기저기 장난 전화를 건다. 사진작가를 꿈꾸는 소년은 도시의 풍경을 찍다가 사진 속에 찍힌 소녀를 좋아하게 된다. 소녀의 장난전화를 계기로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던 네 명이 얽히며 이야기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영화 '공포분자'. /에이썸픽쳐스
영화‘공포분자’는 1980년대 고속 성장한 대만의 풍경을 통해 도시인의 불안과 고독을 들여다본다. /에이썸픽쳐스

소설가 아내와 사진 찍는 소년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오간다. 아내는 우연히 집으로 걸려온 장난 전화 이야기로 소설을 쓰면서도 “소설은 허구일 뿐 현실이 아니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쓴 소설은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오히려 현실에서 보지 못했던 진실을 드러낸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대표작 ‘하나 그리고 둘’에서도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아이가 등장하는데, 아이는 하나같이 사람들의 뒷모습만 찍는다. 왜 자꾸 뒷모습만 찍느냐는 물음에 아이는 “우리는 앞만 보고 뒤를 못 보니까 반쪽만 볼 수 있잖아요”라고 답한다. ‘공포분자’ 역시 허구를 통해 현실에서 잃어버린 반쪽을 보여주는 영화다.

시대와 도시가 품은 정서를 빛바랜 사진처럼 고요하게 드러낸다. 길 위에 쓰러진 사람들을 버려진 동물처럼 담담히 비추는 시선은 비정하기까지 하다. 주변엔 총소리와 개 소리, 경찰차 소리가 들리지만 아무도 쓰러진 이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파국에서 흐르는 서정적인 노래들이 아이러니를 극대화한다. 영화는 멀리 떨어진 시선에서 이들을 관조하지만, 그럴수록 화면 속 인물들이 느끼는 공포는 한없이 가깝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