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은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1920년대의 파리로 돌아갔다. 화가와 작가, 예술가의 도시, 그가 동경하는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가 그곳에 있었다. 해남 윤씨의 종가인 ‘녹우당(綠雨堂)’ 특별전을 준비하던 가을, 나는 18세기 조선의 감성과 매력에 푹 빠졌었다. 녹우당은 집 뒤편 비자나무 숲에 바람이 불면 초록 비가 내리는 듯하다는 데서 유래한다. 바람의 색과 소리를 보던 세상 끝의 집, 그곳에 공재 윤두서(1668~1715)가 있었다.

얼굴 전체를 뒤덮는 사실적인 수염과 정면을 응시한 강한 눈빛으로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 자화상의 주인공. 누군가는 과거에 합격하고도 당쟁으로 출사하지 못한 지식인의 우울한 내면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과 책, 그의 물건에 다가갈수록 자신을 성찰하는 깊은 눈매로 주변을 긍정하는 호기심 가득한 이가 있었다. 그는 지리⋅천문⋅의학⋅수학 등 다양한 학문에 개방적이었고 관념 속 세계가 아닌 현실의 세계와 사람들을 그려냈다. 새 시대를 연 거장이라는 찬탄보다 자신의 그림이 만족스럽지 않다며 ‘그림의 경지가 이토록 이루기 어려운가’를 토로하는 그의 목소리가 좋았다.

윤두서가 한양에 머물던 시절, 오랜 벗과 눈을 반짝이며 함께 읽었던 책은 녹우당에 남았다. 지식과 기억을 저장한 녹우당은 또 다른 시간을 연결하는 공간이 되었다. 아들 윤덕희는 편집자이자 큐레이터로 좋은 글씨와 그림을 가려 뽑아 ‘윤씨가보(尹氏家寶)’ ‘가전보회(家傳寶繪)’라는 화첩을 만들었다. 윤두서의 외증손자 정약용은 자화상을 본 날, 자신이 할아버지를 닮았구나 조용히 읊조렸다. 외롭고 긴 유배 기간에 정약용은 대흥사의 초의선사와 교류했고, 초의는 화가의 꿈을 키웠던 허련을 녹우당에 소개했다. 훗날 허련은 윤두서 그림과의 만남으로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회고했다. 녹우당은 더 이상 ‘세상 끝의 집’이 아니었다. 어떤 공간은 다른 시간을 살았던 사람을 연결하고 만난 적 없는 이의 삶을 바꾸기도 한다. 머무르며 마음을 주었던 장소와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을 통해 특정 공간은 장소성을 지니게 된다.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곳, 타임 슬립의 공간은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