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서울 동자동 ‘성분도 은혜의 뜰’ 툇마루에 앉은 이해인 수녀. 그는 “평범한 일상을 긍정하면서 사물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노력했고, 러브레터 같은 시를 쓴 ‘작은 수녀’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오종찬 기자

지난 50년간 쓴 책이 300만부 넘게 팔렸지만, 시인 이해인(78) 수녀는 평생 카드라곤 딱 두 장 가져봤다. 신용카드 아닌 주민등록증과 경로우대 교통카드. 그간 받은 인세는 모두 수녀회에 귀속된다. 수도자는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작권을 친족에게 상속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 3년마다 공증을 받는다. “1년에 한 번 수녀회 경리가 회원들 앞에서 살림살이 보고를 하며 ‘이해인 수녀 인세는 이만큼이다’ 알려줍니다. 1억이 넘게 들어올 때도 있고, 몇천만원 수준일 때도 있지만 저는 한 번도 제 통장을 본 적이 없어요.”

지난달 서울에서 기자와 만난 이해인 수녀는 “비우고 비우는 이 삶이 만만치가 않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간 쓴 책이 지난달 나온 에세이 ‘인생의 열 가지 생각’까지 저서만 20여 권, 선집과 번역서 등을 합치면 50여 권에 달한다. 32세 때인 1976년 낸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가 100만부 가까이 팔렸고,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79), 첫 산문집 ‘두레박’(1986) 등이 연이어 베스트셀러가 됐다. 쇄당 1만~2만 부를 찍던 출판 시장 호황기, 그의 책은 거의 매번 권당 50쇄를 거뜬히 넘겼다.

지난달 19일 서울 동자동 ‘성분도 은혜의 뜰’ 툇마루에 앉은 이해인 수녀. / 오종찬 기자

어릴 때부터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했다. 여섯 살 때 6·25가 나서 부친이 북에 끌려갔다. 전쟁통에서 자랐기에 일찍부터 앞당겨 죽음을 묵상했다. 먼저 수녀가 된 언니가 이해인을 수도자의 길로 이끌었다. 스무 살 때인 1964년 수녀원에 입회했다. 포기와 희생이 수도자의 덕목이라 믿어, 쓰고 싶은 욕망도 애써 접었다. 그렇지만 재능은 주머니를 뚫고 비어져나온 송곳처럼 빛을 발했다. 몰래 끄적인 시를 우연히 본 관구장 임남훈 수녀가 당시 가톨릭출판사 사장으로 있던 김병도 몬시뇰을 소개했고, 김 몬시뇰의 주선으로 만난 시인 홍윤숙이 “혼자 보기 아깝다”고 평했다.

1976년 2월 종신서원을 기념해 수녀회 안에서만 돌려보기로 하고 1000부가량 첫 시집을 찍었는데, 우연히 언론에 소개된 표제작 ‘민들레의 영토’에 독자들이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로 시작하는 맑고 깨끗한 시가 세상사에 지친 이들의 가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재소자들로부터 편지를 많이 받았어요. 정결한 수녀님도 이렇게 자기반성을 하는데 죄 많은 내 삶이 너무 부끄러워 엉엉 울었다고.”

이해인 수녀가 2023년 6월 19일 오후 서울 용산 은혜의 뜰에서 인터뷰하며 활짝 웃고 있다. / 오종찬 기자

쉽고 진솔한 시어는 이해인 수녀가 지난 50년간 쉼 없이 독자들로부터 사랑받은 비결이다. 이를테면 그의 대표작 ‘수녀1′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구의 아내도 아니면서/ 누구의 엄마도 아니면서/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건 여인아”…. 이 수녀는 “담백하고 진솔한 것이 내 글의 장점이다. 그렇지만 독자를 끌기 위해 일부러 쉬운 말로 쓰는 건 아니다. 아마도 그것이 나의 개성이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재능인 것 같다”고 했다.

2008년 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투병 중에도 시집과 산문집 등을 끊임없이 냈다. 언제나처럼 모두 잠든 밤,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엎드려 연필로 썼다. “내일은 내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간절함으로 썼다”고 이해인은 말했다. 그에게 시를 쓰는 일은 수도자로서의 소임이자, 신(神)에게로 가는 방편이기도 하다. “타고르는 ‘기탄잘리’에서 시인을 절대자가 새로운 노래를 불어넣는 ‘갈대피리’에 비유했어요. 저의 역할도 그 피리와 같습니다. 저는 지난 47년간 수녀원에만 틀어박혀 있었지만 제 시가 날아가 선교와 복음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신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수녀가 환속하지 않고 아직도 ‘민들레의 영토’를 가꾸고 있다는 사실에 독자들이 보람을 느낀답니다.”

이해인 수녀의 ‘좋은 글 쓰려면’

글쓰기가 어려운 이들에게

예비 수녀들에게 문학 수업을 한 적이 있다. 식당에서 조갯국이 나온 날, 국 속 조개껍질을 다 떼어 흩어놓고 다시 제 짝을 찾아보라고 시켰다. 그 과정에서 느낀 사랑과 우정의 개념을 정의하는 글을 써 보라고 했다. 시계, 십자가 등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소지품에게 편지를 써보라고 한 적도 있다. 모든 이들의 내면에는 글 쓰는 능력이 있다. 그 잠재력을 깨닫고 발휘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닮고 싶은 작가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읽고 그처럼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시성(詩聖) 타고르의 시는 종교적이면서도 자연친화적이라 좋아한다. 윤동주의 ‘서시’를 특히 좋아하는데 선한 영향력을 주는 별 같은 삶과 글이 일치하는 걸 닮고 싶다는 갈망이 있다.

표현력은 어떻게 키우는 게 좋을까

다른 사람이 쓴 글에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표현을 필사하면 도움이 된다. 베끼라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라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꽃 이름이나 나무 이름처럼 모르는 것이 나오면 사전뿐 아니라 도감을 찾아서라도 끝까지 찾아내며 연구해야 한다. ‘공부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조건이다. ‘이름 없는 꽃’ ‘이름 없는 새’ 같은 구절이 있는 글은 성의가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