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어드

조지프 헨릭 지음|유강은 옮김|21세기북스|768쪽|4만2000원

다음 글은 한 학자가 1068년 스페인 톨레도에서 남긴 문명(文明)에 대한 묘사다.

“과학을 일구지 못한 이 집단은 사람보다는 짐승에 더 가깝다. 그들은 기질이 냉랭하고, 배가 불룩하고, 이해력과 지능이 부족하다.”

제국이 식민지를 바라보는 ‘유럽 중심주의적’ 시각에서 쓰인 글로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이슬람 학자 사이드 이븐 아흐마드가 남긴 유럽인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 평가는 300년이 지나며 달라진다. “로마 속국 땅(유럽)에서 과학이 번성하고, 그것을 공부하는 수업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1377년 역사학자 이븐 할둔이 묘사한 유럽 풍경. 이처럼 유럽의 발흥은 그들의 지중해 건너 이웃에게도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유럽 문명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왜 산업혁명은 유럽에서 일어났나”와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수히 제출되어 왔다. 상업의 부상, 영국의 석탄 자원, 잦은 전쟁으로 인한 자극…. ‘총, 균, 쇠’ ‘사피엔스’ 등 그동안 사회적 물질적 요인을 중심으로 문명사를 조명한 책은 많았지만, 인간을 움직이는 내적 동기를 설명한 시도는 드물었다. 하버드대학교 인간진화생물학과 교수인 저자는 기독교 문화가 인간에게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서구만의 독특한 심리 구조와 습관의 형성 과정을 조명한다.

저자는 서구 사회가 법률, 정치, 과학, 종교 등에서 다른 문명에 비해 앞서 나갈 수 있었던 이유로 ‘WEIRD’ 문화를 지목한다. ‘이상하고 별나다’는 뜻의 이 단어의 알파벳 하나하나는 서구인들의 집단적 특성을 의미한다. ‘서구의(Western)’ ‘교육 수준이 높고(Educated)’ ‘산업화된(Industrialized)’ ‘부유하고(Rich)’ ‘민주적인(Democratic)’ 사람들이라는 것. 미국의 주류 지배계급을 뜻하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앵글로색슨계 미국 신교도)’의 서구 문명 ‘확장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WEIRD’는 세계의 다른 대다수 사람들과는 달리, 개인주의적이고, 관행을 따르지 않으며, 분석적이다. 이들은 관계와 사회적 역할보다는 자기 자신의 성취와 열망에 초점을 맞춘다.” WEIRD들의 이런 특징이야말로 서구가 문명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이유라는 것이다.

도식을 분석하고 있는 남성. 저자는 서구인들이 분석적 사고와 독립성을 갖추게 되는 심리 구조의 변화를 통해 서구 문명의 도약을 설명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저자는 그 심리를 형성한 가장 주된 원인으로 중세 기독교가 바꿔 놓은 유럽의 가족 제도를 꼽는다. 기독교는 친족과의 결혼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믿었고, 315년 네오카이사레아 공의회에선 형제 부인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등 4세기부터 근친혼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가족 간의 결혼은 11세기에 이르면 유럽 대륙에서 점점 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그 결과 친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는 점차 와해됐다. “이후 유럽인들은 상호 의존적인 전통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았다. 도시로의 이주가 쉬워지면서 도시 인구가 늘어났고, 그 결과는 자치도시, 길드, 대학 같은 ‘자발적 조직’의 발전과 확산으로 이어졌다.” 일을 통해 성취감을 얻고 싶어하는, ‘개인주의화’된 사람들의 증가가 이후 시장과 정치 제도의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반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대부분 지역에서 WEIRD 성향이 발달하지 않았던 이유로 ‘논농사’를 제시한다. 논 경작은 많은 인구와 협동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개인적 성취보단 공동체를 더 중요시하는 데 관심을 쏟게 됐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실제로 중국의 한족 참가자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심리 실험에선, 논농사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성(省) 출신 사람들이 논농사를 많이 짓는 지역 출신보다 분석적 사고 능력이 더 높게 나타났다.

한국인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운 부분. 저자는 “WEIRD 사이에선 관계와 무관하게 일관성을 보이는 것이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지만, 한국인은 그 반대”라고 설명한다. 한국인의 경우엔 상대가 교수인가, 부모인가, 친구인가 등 관계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며 그것을 성숙과 지혜라고 여긴다. 서구 사회와 달리, 한국에선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태도를 갖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스스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종교적 믿음 또한 문명 발전의 토대가 됐다. 저자는 “프로테스탄티즘은 교육을 받은 노동력을 제공했고, 이는 급속한 경제 발전과 2차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됐다”고 말한다. ‘WEIRD 문화’는 성취감에 대한 열의가 모여 탄생한 사회라는 것이 저자의 말. 이 밖에도 저자는 유럽의 전쟁, 일부일처제, 법률 등을 통해 서구 문명을 일군 ‘괴짜’들의 연원을 추적해간다.

저자의 결론은 ‘서양이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인구 집단 간 심리 구조 차이가 있기 때문에, ‘WEIRD식 제도’의 효과와 적합성은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 서구의 독특한 심리가 만들어진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인구 집단마다 특정한 맞춤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가 남기는 메시지다.

인간의 심리 변화 과정을 통해, ‘문명’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어렵지 않게 풀어낸다. 750여 쪽에 달하는 벽돌책이지만 깨볼 만한 가치가 있다. 현대 문명의 형성 과정에 대한 통찰과 지식이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