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에즈라 보걸 지음|김규태 옮김|까치|592쪽|2만7000원

1978년 10월 덩샤오핑이 일본을 방문했다. 덩은 후쿠다 총리에게 일본이 당나라 때 수입한 문물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교사와 학생의 역할이 바뀌었다.” 문화혁명의 혼란을 딛고 개혁·개방을 준비하던 덩샤오핑은 이제 중국이 일본의 기술과 자금, 경험을 배우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작년 말 만 90세로 타계한 에즈라 보걸(Vogel) 미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덩샤오핑 평전’ ‘넘버 원 저팬’(Japan as Number One) 같은 베스트셀러를 펴낸 동아시아 연구자다. 그가 타계 직전인 2019년 출간한 ‘중국과 일본’(원제 China and Japan: Facing History)은 20세기 후반 세계 강대국으로 떠오른 두 나라의 협력과 갈등의 역사를 1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한다.

보걸은 일본이 중국 문명의 기초를 배운 7~9세기, 중국이 일본에서 배운 1895~1937년과 1972~1992년의 세 시기를 주목한다. 야마토 정권이 600년 중국에 첫 외교 사절단을 파견한 이후 838년까지가 첫 번째 단계다. 일본은 불교와 유교, 율령과 통치 시스템, 문학과 음악, 건축을 중국에서 받아들였다. 견당사와 유학생, 승려들이 대거 중국에 몰려갔고, 중국의 승려, 학자, 상인들이 일본에 건너왔다.

덩샤오핑이 1978년 10월 24일 일본 가나가와현 자마시의 닛산 자동차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덩은 중국 현대화를 위해 일본의 기술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보걸은 이런 문화적 공통 기반이 양국의 공감대를 높이는 토대라고 말한다. 754년 나라의 도다이지에 도착해 대불상 봉헌식을 주관하고 일본 승려들을 가르친 당나라 승려 감진(鑑眞)이 대표적 사례다. 감진이 죽은 뒤 제자들이 만든 등신불은 일본 국보로 지정될 만큼 예술성이 뛰어났다. 1980년 중국이 이 등신불을 그의 고향 사찰로 모셔오자 일본 불교도들은 감진이 가르친 일본의 절에 있던 8세기 석등을 우호의 상징으로 보냈다. 양국 국민이 우호 증진을 바랄 때 과거는 귀중한 자산이 된다.

838년 마지막 사절단이 떠난 이후 1862년 일본 대표가 상하이에 도착할 때까지 중일 관계는 기본적으로 상인들이 이끄는 무역을 축으로 돌아갔다. 1403년부터 1547년까지 조공 사절이 오갔지만 이후 공식 접촉은 끊겼다. 두 나라 관계는 1894년 청일전쟁을 맞아 극적으로 바뀐다. 중국은 관료와 유학생을 일본에 보내 일본 메이지 시대의 개발 경험을 배우려고 했다. 해마다 수백명의 관료가 일본을 방문했고, 수백명의 일본인 교사와 조언자들이 중국에서 일했다. 1937년까지 약 5만명의 유학생이 건너갔다. 중일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 것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이었다.

1972년 9월 27일 다나카 당시 총리가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를 만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1978년 덩샤오핑의 일본 방문은 교류의 물꼬를 텄다. 덩은 공식적인 평화우호조약 문서 교환과 함께 진시황 때 서복이 구하러간 ‘마법의 약’을 찾으러 왔다고 했다. 그 마법의 약은 현대화를 이루는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동아시아에선 2000년 전 역사가 현재로 이어진다. 덩샤오핑이 일본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택연금 상태인 다나카 전 총리를 방문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다나카는 록히드 뇌물 스캔들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이었다. 다나카를 만난 덩은 “물을 마실 때는 우물을 판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덩은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그가 쏟은 노력을 기억하고 감사를 표했다.

보걸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다. 현대사회를 낳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조를 추적하기 위해 역사적 접근법을 택했을 뿐이다. 전문 역사학자의 훈련을 받은 적 없다고 고백한 대로 한문 1차 사료를 읽을 수도 없다. 그런 약점을 해당 분야 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의지해 돌파했다. 그래도 1500년의 방대한 역사에서 현대의 중일 관계를 만든 뼈대만 추려내 전달하는 솜씨가 거장답다. 하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일본에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중국이 반일 감정을 애국심 마케팅으로 활용하지 말 것을 주문하기는 한다.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 사업이나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 프로젝트로 협력을 확장하면 두 나라가 ‘뜨거운 관계’는 아니더라도 ‘따뜻한 관계’ 정도는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중·일간의 밀접한 접촉이 미국에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현재 돌아가는 국제 질서는 보걸의 낙관과는 한참 멀리 떨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