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어 핸슨의 책 '벌의 사생활'/에이도스

벌의 사생활

소어 핸슨 지음|하윤숙 옮김|에이도스|402쪽|2만원

벌은 원래 육식이었다. 파리, 진딧물, 나비, 거미 등을 잡아 침으로 죽이거나 마비시킨 다음 유충에게 먹이는 말벌의 습성은 1억5000만년 전부터 내려온 전략이다. 그러나 공룡의 전성기 무렵이던 백악기 중기 어느 시기쯤 말벌의 일종인 구멍벌의 한 대담한 집단이 가장 말벌다운 이 습성을 포기하고 ‘채식주의’로 전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벌로 진화했다.

새로운 식생활을 시작하면서 벌은 꽃가루를 채집하고 운반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수술의 화분이 암술 머리에 붙는 ‘꽃가루받이’를 매개해 꽃의 번식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벌 화석에도 이미 채식주의자 벌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그래서 벌이 언제 진화했는지, 왜 진화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학자들은 짐작한다. 자신이 먹을 꽃꿀과 새끼에게 먹일 단백질 풍부한 꽃가루까지 ‘원스톱 쇼핑’이 가능한 꽃에서 먹이를 찾는 편이 사냥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했을 거라고.

레프 톨스토이에서 폴 매카트니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채식주의자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 생활방식이 건강과 환경 측면에서 다양한 이점이 있다고 홍보해 왔다. 그러나 벌의 채식주의는 단지 생활방식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미국 보존생물학자이자 ‘깃털’로 자연사 부문의 뛰어난 책에 주는 존 버로스 메달을 수상하기도 한 저자는 채식주의자로 변신한 벌과 꽃의 공진화(共進化)를 섬세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꽃에 날아드는 벌 한 쌍. 꽃의 자외색들은 종종 ‘꽃꿀 지표’라고 일컬어지는 과녁 패턴이나 방사상 줄무늬를 형성해 마치 빛나는 화살표처럼 달콤한 꿀과 꽃가루의 근원을 벌에게 알려준다. /게티이미지 코리아

화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초기의 꽃은 아주 작고 눈길을 끌지 못하는 존재였다. 침엽수와 양치종자식물과 소철류들이 지배하던 식물군의 아주 미미한 참여자였을 뿐이었다. 꽃식물이 벌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방향으로 진화하면서 후기 백악기 지층에서는 돌연 아주 다양한 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진화는 점증적으로 이루어진다 여겼던 찰스 다윈은 이런 꽃식물의 부상을 ‘가공할 만한 의문’이라 불렀다.

꽃가루받이 체계에서 벌을 빼버리면 꽃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갖가지 매력적 특징을 모두 잃게 된다. 벌은 모든 꽃가루 매개자 중 가장 수가 많고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시인 롱펠로가 꽃을 가리켜 “저토록 파랗고 빛나는 황금빛”이라 노래했을 때 그는 아마 벌 눈의 시각 수용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찬찬히 살펴본 꽃다발에 저런 색조가 많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대다수 벌이 볼 수 있는 빛의 스펙트럼은 오렌지색 가운데 노란빛이 더 많은 영역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밝은 파란색에서 절정을 이루다가 점점 내려와 자외선으로 알려진 짧은 파장까지 이른다. 이런 빛깔들이 벌의 시각 스펙트럼 한복판에 정확히 들어오기 때문에 꽃은 꽃가루 매개자인 벌에게 구애하기 위한 경쟁적 노력으로 특히 이런 색깔을 채택하게 되었다. 저자는 “만일 벌의 노동을 얻으려는 홍보의 필요성이 없었다면 겨자꽃에서 수레국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꽃에서 색깔이 아주 드물었을 것”이라 말한다.

향기 역시 벌과 관련된 특성이다. “해 뜰 무렵 향기 가득한” 아름다운 꽃 정원을 그리워한 시인 휘트먼은 섬세한 생물학적 관찰을 한 셈이었다. 아침 시간 기온이 올라가고 배고픈 벌들이 밤새 꽃꿀로 가득 찬 꽃을 찾아 나서느라 활발해질 무렵이면 많은 꽃향기가 정말로 물씬 강하게 밀려온다. 벌의 더듬이는 눈보라처럼 밀려오는 많은 냄새들을 분류하는 역할을 한다. 저자는 “벌이 없었다면 아마 휘트먼은 달빛이 비치는 밤을 산책 시간으로 삼아 나방이 꽃가루받이를 하는 꽃의 역겨운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꽃의 형태도 벌을 불러들이기 위해 진화했다. 화가 모네가 ‘해바라기’에 곤충을 그리려 했다면 벌뿐 아니라 등에, 나비, 딱정벌레 등 다양한 벌레를 그려야 했을 것이다. 둥근 모양의 꽃은 일반적으로 꽃꿀을 찾는 모든 생명을 두루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보다 정교한 형태의 꽃은 특정 방문객을 염두에 두고 진화한다. 모네의 ‘붓꽃’엔 뒤영벌만 그려도 됐을 것이다. 좌우상칭의 꽃은 목표를 겨냥해 접근하는데 용이한 벌만 흔히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에세이 형식을 가미해 서정적으로 서술, 과학책이지만 진입장벽이 낮다. 대다수 벌이 잘 쏘지 않고 심지어는 침조차 없는 벌도 있다는 것, 침은 암컷 벌의 번식 체계가 확장된 것이라 쏘지 못하는 벌은 주로 수컷이라는 것 등 아름다운 꽃의 세계를 일궈낸 이 자그마한 곤충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득 담았다. 원제 Buzz. 곽아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