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의 이슈&북스] ‘왜 분노해야 하는가’

지난달 교육부 감사에서 고려대 교수들이 서울 강남의 유흥주점 두 곳에서 연구용, 또는 행정용으로 써야 할 학교 법인카드를 200여 차례나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술 마시고 밥 먹는 데 쓴 돈이 무려 6600여만원을 썼다. 그런데 교수들 가운데 장하성 주중 대사가 포함됐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장 교수를 비롯한 고려대 교수들은 일반음식점으로 업태를 위장한 주점에서 카드를 사용했다. 이 주점은 양주 등을 판매하며 별도의 룸을 갖췄고 여성 종업원이 술 시중을 든다. 실제 업소 입구엔 ’19세 미만 출입·고용금지 업소'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일반 음식점이 아니란 뜻이다. 교육부와 고려대는 학교 법인카드의 유흥업소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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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교수들은 써서는 안 되는 곳에서 카드를 썼을 뿐 아니라 카드 쪼개기까지 한 사실이 들통났다. 카드 쪼개기는 보통 결제금액이 많이 나왔을 때 결제 금액이 적은 것처럼 눈속임하기 위해 쓰는 수법이다. 카드 쪼개기를 했다는 것은 그게 잘못된 행동이란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장 대사는 모두 12차례 쪼개기 결제를 했다. 심지어 동료 교수들과 함께 같은 시간대에 ‘3중 쪼개기’ 결제까지 한 정황이 드러났다. 장 대사는 국감에서 카드 부정 사용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이 업소를 유흥업소가 아닌 음식점이라고 주장했다.

고려대 학생들은 옛 스승의 행태에 배신감을 토로했다. 다른 교수들에 대해서도 학생들은 비판했지만, 특히 장 대사에게 비판이 집중된 것은 평소 그가 한 말과 실제로 한 행동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한 학생은 고대 커뮤니티 사이트에 이렇게 썼다. “교수님, 가르침대로 분노하면 됩니까.”

학생이 장 대사가 가르친 대로 분노해도 되느냐고 물은 것은, 장 대사가 고려대 경영대 교수 시절이던 2015년에 쓴 책 ‘왜 분노해야 하는가’를 두고 한 말이다. 장 대사는 이 책에서 기성세대는 한국의 불공정·불공평을 고칠 수 없다며 청년들이 분노해야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썼다.

‘지금의 정의롭지 못한 한국을 기성세대가 만들었는데 청년세대에게 세상을 바꾸는 짐을 떠넘기는 것은 기성세대가 무책임한 것이다.(중략) 필자도 기성세대이기에 책임이 있다. 그러기에 청년세대에게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말해주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멘토질 같은 잔소리를 하려고 한다.’(‘왜 분노해야 하는가’ 38~39쪽)

장하성 지음

장 대사는 세상은 불공평하기 때문에 청년들은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청년세대의 아픔은 결코 스펙쌓기와 자기계발, 긍정과 힐링으로 치유될 수 없다.(중략)자기 계발은 사기다. 긍정의 행복을 버려라. 나만은 된다는 것은 허구다.”

자기 실력 키워 공정하게 경쟁할 생각하기보다는, 남 탓하고, 세상 탓하라는 얘기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1801년 신유박해로 귀양을 떠나자 두 아들이 세상을 원망하는 편지를 다산에게 보냈다. 그러자 다산은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답장을 보내 두 아들을 꾸짖었다.

“너희는 험난한 삶이라는 둥, 굽이진 길들처럼 힘든 삶이라는 둥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말투니 큰 병통이다.”

잘못된 세상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 다산은 그러나 행여 자식들이 세상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데 소홀히 하지 않을까, 아버지로서 걱정했던 것이다. 이게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이자, 참다운 어른의 자세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남을 탓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연구용으로 준 카드는 부정사용하는 자신부터 바뀌어야 한다. 평생 경영학 공부한 장 대사가 경력에 걸맞지 않게 중국 대사 감투를 받지 말아야 세상이 바뀐다. 그래야 코드 인사 없는 세상, 적재적소에 인재가 기용되는 세상으로 바뀐다.

민주화운동의 대부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김정남 전 청와대 교문수석도 최근 한 일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정권을 향해 “모든 개혁은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저는 정권 담당 세력부터 도덕성과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봐요. 다른 사람의 눈에 그들이 정의롭게 비치지 않는다면 독재 군사정권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중략) 모든 개혁은 나부터 시작해야 하거든요. (중략) 내가 먼저 달라지고 변하는 그런 운동을 정권에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해서 사회 전반적으로 확대해 나가야죠. 그래야 국민 통합을 향한 희망이 싹틀 수 있어요.”

장하성 대사가 책에서 주장한 대로 우리는 잘못된 세상에 분노해야 한다. 불의와 부정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정권, 사과도 하지 않는 인사에게 국민은 분노해야 한다. 청년뿐 아니라 유권자 모두가 분노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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