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항아리

수전 손택:영혼과 매혹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한재호 옮김|글항아리|500쪽|2만5000원

/글항아리 1979년 뉴욕의 서재에서, 수전 손택.

“질병은 삶을 따라다니는 그늘, 삶이 건네준 성가신 선물이다. 사람들은 모두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 이 두 왕국의 시민권을 갖고 태어나는 법, 아무리 좋은 쪽의 여권만을 사용하고 싶을지라도, 결국 우리는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우리가 다른 영역의 시민이기도 하다는 점을 곧 깨달을 수밖에 없다.”

코로나 패닉이 정점에 올랐던 지난봄, 확진자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우려하며 많은 이들이 소셜미디어에 이 구절을 공유했다. 미국 작가 수전 손택(1933~2004)의 에세이 ‘은유로서의 질병’(1978)에 나오는 문장들로, 30년간 유방암으로 투병한 손택이 환자에게 부여되는 ‘낙인’을 우려하며 썼다.

독일 비평가 다니엘 슈라이버는 손택 사후 첫 평전인 이 책에서, 뉴욕타임스가 “20세기 문단에서 가장 찬양받는, 그러나 동시에 가장 평가가 엇갈리는 존재”라고 평가한 이 매혹적인 여성의 일대기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1963년 가을 수전 손택의 첫 소설 ‘은인’을 출간할 때, 출판사 FSG의 발행인 로저 스트로스는 유명 작가 케네스 버크, 독일 철학자 해나 아렌트 등이 미사여구를 동원해 쓴 추천사를 버렸다. 대신 뒤표지 전면에 당시 스물아홉이었던 손택의 사진을 실었다. 표정은 꽤나 진지했지만 멋스럽게 자른 새카만 단발머리를 하고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입은 모습은 작가가 아니라 패션잡지 모델이라고 해도 될 것처럼 보였다. 슈라이버는 “지적인 주체와 대상화된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의 공생은 여기에서 처음 전형적으로 표현됐다”고 분석한다. “손택은 순진무구함과 계산적인 면모를 스스로 혼합함으로써 건조하고 남성적인 지식인 세계에 화려함과 낭만을 불어넣으며 자신의 이미지를 유희하듯 수월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고, 다른 대중매체들이 난해한 아방가르드 작가인 손택에게 흥미를 보이게 해준 것도 바로 이 이미지였다.”(140쪽)

/글항아리 1979년 파리에서, 수전 손택.

손택은 1960~70년대 미국 지식인 사회의 패션(fashion)이었다. “현대의 해석이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이므로, 비평가의 공격으로부터 예술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표작 ‘해석에 반대한다’(1966) 출간 이후로 그는 뉴욕 지성계의 새로운 감수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문화적 소양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손택의 에세이를 읽었다. 초판 8000부가 금세 팔렸는데 인문서로서는 드문 성과였다.

명문 시카고대와 하버드, 옥스퍼드와 소르본대에서 수학한 뛰어난 두뇌, 열여섯 살에 대학에 들어가 열일곱에 결혼했으며 열아홉에 어머니가 되고 스물다섯에 이혼한 후 동성과 이성을 가리지 않고 사랑했던 자유분방함, 매혹적인 글솜씨와 우울한 기질, 아름다운 육체를 잠식한 유방암이란 병마까지... 책은 남성 위주의 지식인 사회에서 드물게 재능을 인정받는 여성 지식인의 모든 요건을 다 갖춘 이 여자가 당시 대부분의 여성과는 달리 남편 성 따르기를 거부하고, 남성의 뮤즈로 안주하기보다 독립적 존재로 우뚝 서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아버지 때문에 부모와 떨어져 홀로 미국에 남아 보모 손에 자란 예민한 소녀가 롤모델을 찾기 위해 독서에 탐닉하는 과정은 특히 섬세하게 묘사된다. 폴란드계 유대인으로서 폴란드 출신 퀴리 부인 전기를 탐독하며 그의 성취를 동경하고, 글 쓰는 여자로서 ‘작은 아씨들’의 조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눈이 따가울 때까지 뉴욕 지성계의 소설과 잡지를 읽고 일기를 썼으며, 용어를 공부하고 외국어 단어 목록을 작성해 가며 어휘력을 키운다. “아이라는 게 너무 짜증이 나” 읽기를 통해 스스로를 혹독하게 단련시킨 외로운 소녀를 상상해보자면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아홉 권의 에세이집, 네 권의 장편소설과 한 권의 단편집, 몇 편의 영화 시나리오와 희곡, 완성되지 못한 수많은 프로젝트를 남기고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뜬 이 여자는 9·11 이후 부시 행정부의 전쟁 선동을 비판하며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집단의 광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떠야 하는 시대, 곱씹어보게 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