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米壽)의 나이에도 여전히 전기톱을 들고 나무를 깎는 김윤신 조각가. /이윤숙 작가 제공

한번 썰면 끝을 봐야 한다.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88)은 전기톱으로 나무를 깎는다. 40년 가까이 오직 팔힘으로. 악수하는 아귀힘이 다부졌다. “체인이 무척 세차게 돌아간다. 쉬엄쉬엄할 수가 없다. 터치가 거칠다 보니 예상 밖의 재밌는 질감이 나온다. 무서우니까 온 정신을 쏟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전기톱 때문에 다친 적은 없다.” 그의 생애 첫 국내 국·공립미술관 개인전이 서울 남현동 남서울미술관에서 5월 7일까지 열린다. 호두나무·은행나무·팔로산토…. 그가 평생 매만진 나무 수십 그루가 거기 놓여있다.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최근까지 현지에서 작업해왔다. 나무 때문이다. “당시 아르헨티나에 살던 조카 집에 놀러 갔다. 그곳 목재가 단단하니 정말 좋았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굵은 나무가 별로 없었다.” 곧장 대사관과 미술관을 찾아갔다. 이 나라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고. “한국에서 가져온 작품이 없어 두 달 뒤에 신작을 들고 미술관장을 다시 만났다.” 상명대 교수직을 포기하고, 이듬해 부에노스아이레스 현대미술관에서 야외 조각 전시를 열었다. “교수가 아니라 작가이고 싶었다.” 오빠인 독립운동가 김국주(1924~2021) 장군은 “군대에서도 배신을 안 당해봤는데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며 통탄했다고 한다.

1994년 아르헨티나에서 완성한 나무 조각(왼쪽)과 2022년 수원에서 제작한 신작(오른쪽). /남서울미술관

전기톱과의 인연도 거기서 시작됐다. 1986년이었다. “처음엔 그냥 활톱으로 잘랐다. 작업실이 따로 있는 게 아니어서 길거리에서 나무를 잘랐는데, 동네 사람들이 전기톱을 쓰라고 추천하더라.” 굉음의 나날이 이어졌다. 나무에 온갖 돌을 자르며 실험에 매진했다. 파리 유학 후 귀국해 197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했고, 1974년 한국여류조각가회 설립을 주도하며 국내 조각계에서 한창 보폭을 넓히던 그는 “아르헨티나로 간 것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무도, 오닉스나 소달라이트·백운석 같은 예쁜 돌도 알게 됐잖나. 떠나지 않았으면 결코 못 만났을 것이다.” 2008년 현지에 ‘김윤신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쪼개진 나무의 껍질과 속살이 하나로 상승하는 형태를 띤다. 제목은 일관되게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다. “서로 다른 둘이 만나 하나가 되고 그 합이 다시 둘로 나뉘다 또 다른 하나가 된다”는 의미의 동양적 음양 사상을 담고 있다. “별다른 구상을 하지는 않는다. 그저 며칠 동안 나무를 바라볼 뿐이다. 내가 누구인가 생각한다. 내 작업 주제는 항상 ‘염원’이다. 염원하려면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니까. 쌓거나 올라가거나 퍼져나가는 게 바로 염원의 형태다.”

남서울미술관 2층 전시장에 놓인 신작 앞에서 김윤신 조각가가 다리를 뻗은채 앉아있다. /전기병 기자

금강산 근처 강원도 원산에서 자랐다. “숲이 내 친구였다”고 했다. “나무는 한결같다. 어디서나 볼 수 있고 다 자라면 집이 된다. 사람과 가장 가깝고 사람과 함께 살아온 존재라 좋다.” 지난해 여행차 귀국해 1년째 수원에 있는 제자의 작업실에서 나무를 깎고 있다. 유년에 바라보던 하늘을 회상하며 국산 나무를 손질해 화사한 색상을 입힌 신작도 선보인다. “오랜만에 와보니 젊은이들의 활력이 놀라웠다. 자꾸 새로워지는 게 눈에 보이더라. 이제는 여기에 더 많은 작품을 남겨야겠다는 염원이 생겼다. 일하다 숨이 끊어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