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배우 이영하가 오랜 지기 김병종 화가가 먹펜으로 그려 선물한 자신의 초상화를 들어 보이고 있다. 작은 그림은 뒤편에 걸린 김병종 화가의 ‘생명의 노래–12세의 자화상’이다. /김지호 기자

배우 이영하(71)씨는 50년 전의 연극판을 떠올렸다. 1973년 무렵이었다. 최불암 선배의 모친이 운영하던 대폿집에서 몇 잔의 술을 홀짝이던 그는 당시 희곡을 쓰던 동양화가 김병종(68)씨에게 이렇게 털어놓은 것을 기억한다. “나는 ‘외다수’야.” “그게 뭔데요?” “출연 누구누구 외 다수.”

청춘 스타를 지나 원로의 길목에 접어든 이씨는 그때를 생각하며 웃는다. 그의 집 거실에 김병종의 그림 ‘생명의 노래–12세의 자화상’(2002)이 걸려있다. 부드러운 황톳빛 무대 배경에 홀딱 벗은 꼬마가 누워있다. 나비가 날고 닭이 뛰논다. 꼬마의 살결이 까무잡잡하다. 밖에서 노느라 그랬을 것이다. “어릴 적이 기억난다. 적선동 근처 빨래터에서 연 날리고, 자하문까지 걸어가 물장구 치고 오던…. 동심을 추억하면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 동심은 초심(初心)과 같은 말처럼 느껴진다. 잊고있지만 분명히 그 순간이 존재했음을 이 그림이 일러준다.” 김씨가 5년 전 이 판화를 선물한 이유가 이와 같다. 매일 아침 약 30호 크기(91x73㎝)의 그림 앞에 이씨는 선다.

김병종 '생명의 노래-12세의 자화상'.

김병종의 ‘생명의 노래’ 연작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막에도 수놓여있다. 꽃이나 어린아이의 형상을 빌려 제목처럼 가장 순수한 형태의 생명력을 웅변한다. “그곳에서 공연하며 커튼이 올라갈 때마다 혼자 흐뭇해했다”던 이씨가 2010년 뮤지컬 ‘애니’ 공연 당시 외웠던 대사를 들려줬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너와 함께하는 게 아니라면 가난한 옛날로 돌아가는 것만 못하다…. 스타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요란한 데 눈길 주지 말고 내가 택한 길로 계속 가면 그뿐인 것 같다.” 그런 그에게 10년 전 김병종은 이씨의 얼굴을 그려 건넸다. “가장 소중한 그림”이라고 했다.

이른바 ‘미술계(契)’ 모임을 꾸릴 정도로 열렬한 미술 애호가다. “문화계에서 활동하며 친분이 닿은 12명이 모여 돈을 갹출해 작품을 사서는 제비뽑기로 한 명에게 몰아주는 거였다. 재미로 5년 정도 했다.” 미술관 투어를 위해 러시아만 두 번 찾았고, 촬영차 베트남에 가서는 그곳 국민화가 부샹파이의 그림도 사왔다. “오피스텔에 창고처럼 그림을 모아놓은 적이 있다. 오랜만에 가보니 그림에 곰팡이가 피어있더라. ‘무슨 떼돈을 벌겠다고 보지도 못하는 그림을 쌓아놓나’ 싶었다.” 이후 친구들에게 몽땅 선물했다. “그림 얘기 나오면 가격이 얼마냐, 유화냐 판화냐부터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림만 걸어놓고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최근 TV조선 ‘우리 이혼했어요’로 다시 인기가 올라왔다. 올해 상반기에는 제주도에 그간 수집한 카메라 200여대를 전시한 ‘이영하의 동심, 앤티크 카메라 뮤지엄’이 들어설 예정이다. “여기저기 나와달라는 곳 많지만 쉬엄쉬엄 나를 위해 살겠다”고 말했다. “일 많이 안 하고 그저 코로나 끝나면 김병종 화가와 연극 올리기로 했다. 극작 김병종, 출연 이영하 외 다수.”


☞화가 김병종은 누구?

‘바보 예수’ ‘생명의 노래’ 연작으로 잘 알려진 국내 대표적 동양화가지만, 일찍이 연극에 빠져 1985년 신춘문예 희곡 부문으로 등단하기도 했다. 본지 연재 ‘화첩기행’으로 유명한 글쟁이 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