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내부. 각종 도록을 비롯한 자료를 제공하는 박물관 속 도서관이다. 목재를 사용한 천장의 구조물이 한옥을 연상시키지만 한옥의 문법을 그대로 적용하지는 않았다. /텍스처 온 텍스처

국립경주박물관에 들어서서 신라역사관과 월지관을 차례로 지나 호수를 끼고 돌자 아담한 단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신라역사관(1975)·월지관(1982)이 각각 한국 현대건축의 선구자 이희태·김수근의 작품으로 주목받는 동안 눈길을 끌지 못했던 건축가 미상의 서(西)별관. 40년 넘게 사무실과 수장고로 쓰였던 이 건물이 최근 신라천년서고(書庫)로 거듭나면서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박물관이 소장한 각종 도록과 신라·경주 관련 자료를 볼 수 있는 도서관이다.

김현대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와 김수경 건축가의 리모델링을 거쳐 지난해 12월 개관했다. 실내 공간을 중심으로 진행된 리모델링의 가장 큰 특징은 한국 전통 건축에 바탕을 두면서도 전통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근 이곳에서 만난 김현대 교수는 “옛 건축의 구조적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고 했다. 한국실내건축가협회가 주관하는 골든스케일베스트어워드에서 지난해 협회상을 받았다.

입구에 들어섰을 때 먼저 시선을 끄는 곳은 천장이다. 한옥의 도리(기둥 사이로 건너지르는 나무)나 동자주(서까래를 받치는 짧은 기둥)를 연상시키는 목재 구조물이 촘촘하게 얽혀 지붕 아래를 채우고 있다. 이 구조물이 기존 콘크리트 기둥과 어우러지면서 현대적이면서도 안온한 인상을 만들어낸다. 한옥을 닮았지만 한옥은 아니다. 김 교수는 “전통은 우리가 미래 지향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과거의 것을 그대로 가져오기보다 새롭게 해석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봤다”고 했다.

1979년 완공된 신라천년서고 외관. 콘크리트로 한옥의 형태를 구현했다. /텍스처 온 텍스처

창을 키우고 낡은 페인트를 벗겨내는 등 부분적으로 손을 봤지만 건물의 외관은 달라지지 않았다. 1979년에 콘크리트로 지은 이 건물의 외관도 ‘전통적’이다. 한옥 처마를 의식한 듯 지붕 끝자락을 곡선으로 처리했고, 한옥의 공포(지붕을 받치도록 기둥머리에 짜 넣는 구조물)도 간략하게나마 표현했다. 지붕 꼭대기엔 치미(장식 기와)도 얹었다. 최초 설계자 역시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주제를 두고 고민했음을 보여주는 흔적들이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신라역사관과 월지관 역시 전통과 현대건축의 접목을 실험한 작품들. 조성 초기부터 경주박물관에서 전통의 구현이 중요한 건축적 주제였음을 보여준다.

경주에서 전통이라는 주제는 현재진행형이다. 박물관을 포함한 구도심 일대가 역사문화미관지구로 지정돼 있어 건물 형태가 한옥을 따라야 한다. 고도(古都)의 멋을 지키기 위한 규정이지만, 그 결과로 현대식 건물에 마지못해 기와만 올린 듯 어색한 건축이 등장하기도 한다. 신라천년서고는 이곳에서 전통의 의미는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건축이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전국 13곳의 소속 국립박물관 중에서 일반에 공개되는 도서관을 갖춘 곳은 중앙박물관에 이어 경주가 두 번째다. 박물관 속 도서관답게 신라천년서고는 큐레이션 중심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를 비롯한 주제를 선정하고 관련 자료를 선별해 제공하는 방식이다. 엄숙하기만 한 도서관은 아니다. 관람객들이 편하게 쉬고 머무르며 ‘눕독’(누워서 독서하기)을 즐기도록 푹신한 소파도 마련했다.

신라천년서고 안에 설치된 석등. 서로 다른 시대의 부재들을 조합해 만든 것이다. 도서관이 진리의 등불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텍스처 온 텍스처

대숲이 내다보이는 창 앞에 석등(石燈)이 서서 이곳이 경주임을 실감하게 한다. 박물관 경내 고선사탑(국보 38호) 곁에 이름 없이 서 있던 것을 옮겨왔다. 서로 다른 시대의 부재들을 조합해 만든 석등이 여러 손길을 거쳐 완성된 도서관에 썩 어울린다. 또한 석등은 도서관이 진리의 등불임을 환기하는 은유(隱喩)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