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정재헌이 설계한 '나무호텔' 외관. 2021년 한국건축가협회상 '올해의 건축 베스트 7' 수상작 중 하나다. /사진가 박영채
도심 이면도로변의 번잡함을 적절히 가려서 평온한 휴식 공간을 만들어낸 나무호텔 객실 내부. /사진가 박영채

점점 커지고 복잡해지는 오늘날 도시에서 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오로지 아파트만이 정답일까? 이런 질문에 지금 가장 명확하고 아름다운 해답을 보여주는 건축가가 정재헌(경희대 교수)이다. 올해 ‘나무호텔’로 한국건축가협회상 ‘올해의 건축 베스트 7′을 수상했고, 도시·건축 축제 오픈하우스 서울에서도 집중 조명되면서 새롭게 도약하고 있는 정재헌의 작품을 찾아가 보았다.

서울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인근 혼잡한 이면도로에 들어선 나무호텔은 처음엔 회색 벽돌이라는 재료 외에 별 표정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뒤로 돌아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건물이 숨기고 있던 다양한 표정을 하나씩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인 호텔 로비는 뻥 뚫린 열린 공간이지만 이곳의 로비는 ㄴ 자, ㄷ 자로 마치 미로처럼 방문자를 이리저리 유도하며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프런트에 이르는 좁은 복도를 따라 놓인 돌과 물, 그리고 나무가 숨어드는 빛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정재헌은 20여 년 동안 단독주택을 설계하면서 평온과 휴식이라는 집의 근본적 가치를 깨달았고, 이를 나무호텔에 녹였다. “객실 수는 24개에 불과하지만 10가지 평면 유형이 있을 만큼 저마다 다른 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의 호텔이 아니라 24개의 서로 다른 집을 설계하듯 접근했습니다.” 특히 나무호텔을 일반 부티크 호텔과 구별해 주는 것이 외부 공간이다. 주변의 혼잡한 도시 풍경을 적절히 가리고, 필요한 부분만 살리면서 객실마다 휴식과 사색에 걸맞은 전용 테라스와 마당을 둔 것이다. 방마다 저마다의 풍경과 하늘을 안고 있는 셈이다.

건축가 정재헌

정재헌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의 섬세한 건축 언어와 디테일은 건축계에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지난 2015년 서울 명륜동에 지은 ‘도천 라일락집’은 그의 전성기를 열어준 작업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대표적 서양화가인 도상봉 화백이 기거하던 이곳을 후손들이 지켜오고 있었고, 정재헌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벽돌담을 쌓아가며 대학가의 시끌벅적함 속에서도 가족의 평온을 담은 오붓한 집과 마당을 만들었다. 빨강⋅검정⋅회색 벽돌을 반으로 쪼개 쌓은 독특한 질감의 외관은 후면에 있는 성균관 돌담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후 지금까지 7년 사이에 그는 한국건축가협회상 ‘베스트 7′을 세 번이나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부산함’을 피해 건축 설계에 집중하고 있다.

여러 색깔의 벽돌로 담을 쌓아 번잡한 대학가에서도 가족의 오붓한 평온을 지켜낸 서울 명륜동 '도천 라일락집'. /사진가 박영채
경사진 땅의 모양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담양 '호시담 펜션'.

만약 건축에서 ‘한국성’이 오로지 과거의 전통 양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재헌의 건축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사회·자연 환경과 가장 잘 어울리는 한국적 건축일 것이다. 그가 설계한 전남 담양 ‘호시담 펜션’(2015)은 경사진 땅의 흐름에 건물이 몸을 맡기며 주변 자연과 풍경을 매우 편안하고 수려하게 담아낸다. 경기 양평의 ‘펼친 집’(2014)은 길고 육중한 일자형 박공집의 힘찬 기운이 뒷산의 산세와 조화를 이룬다. 목조나 기와 지붕은 아니지만 땅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그의 건축은 전통 건축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차가운 박스 형태로 대변되는 서구 모더니즘 건축의 한계를 한국적 서정과 풍경으로 극복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힘 빼고 쓴 붓글씨 같은 건축”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에게도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시절이 있었겠지만, 이제야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건축을 하는 것 같다. 도시에서든 자연에서든, 그가 만든 집에서 평온과 자유가 느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