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광주시 자택의 '책방'에서 엄유정 작가의 'FEUILLES'를 들어 보인 신신. 신해옥(오른쪽)이 들고 있는 녹색 표지가 1쇄, 신동혁이 들고 있는 주황색 표지가 3쇄다. /김연정 객원기자

식물 그림을 책으로 엮고 싶다는 화가 엄유정의 제안에 부부 그래픽 디자이너 신신(신해옥·신동혁)이 떠올린 것은 종이 샘플북이었다. 양복집 원단처럼 종이를 종류별로 묶어놓은 견본집. “그림이 크게 네 범주로 나뉘는데, 각각에 어울리는 종이를 매치하기만 해도 특별한 책이 되겠다 싶었지요.”

그렇게 나온 책(미디어버스 刊)의 제목은 FEUILLES(푀유). 이 프랑스어에는 마침 나뭇잎들과 함께 종잇장이라는 뜻이 있다. 이 책은 지난달 독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국제 공모전에서 최고상인 골든 레터(황금활자상)에 선정됐다. 견본집이라는 가장 실용적 대상에서 출발한 아이디어가 가장 예술적인 작품으로 승화한 것이다.

책 디자인 분야 세계 최대 공모전인 이 행사는 자국에서 디자인상이나 기관 추천을 받은 책에 출품 자격을 준다. 한국은 그런 제도가 없어 출품조차 못 하다가 올해 처음 공모전을 열고 10권을 선정해 내보냈으니, 스포츠에 비유하면 국가대표 선발전이 처음 열린 종목에서 올림픽 금메달이 나온 격이다. 신신은 “세계가 우리의 디자인 언어를 정확히 읽고 평가해줬다는 점이 신기하고 또 고마웠다”고 했다.

경기 광주시 자택 겸 작업실 마당에서 ‘푀유’를 들어보인 신신. 신해옥(왼쪽)이 들고 있는 3쇄의 주황색 표지는 석양을, 신동혁이 든 1쇄의 초록색 표지는 낮을 각각 주제로 한 것이다. /김연정 객원기자

종이에 집중한 것은 “원화의 질감을 느슨하게라도 재현해보려는 시도”였다. 섬세한 화집(畵集)인 만큼 고급 인쇄용지를 썼을 것 같지만 실제로 쓰인 건 모조지나 교과서·학습지 용지처럼 흔한 종이들이다. 드로잉이 실린 장(章)엔 삼성전자와 전주페이퍼가 개발한 전자 제품 설명서 용지를 썼다. “가벼운 드로잉이니 얇고 바스락거리고 비치는 종이로 작가의 스케치북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대형 캔버스 작업이 실린 장에는 잉크 묻은 곳에만 광택이 도는 종이로 캔버스에 바른 물감이 반짝이는 듯한 효과를 냈다.

작품 규격이나 제작 연도 같은 정보를 표지 안쪽에 몰고, 해설은 책갈피에 끼워 넣도록 따로 찍었다. 오롯이 그림만으로 독자와 작가가 만나도록 한 디자이너의 배려다. 쪽수조차 적혀 있지 않은 이 책에서 독자는 종이의 촉감으로 책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전자 제품 설명서에 쓰이는 종이를 사용해 뒷면이 비치는 FEUILLES의 첫 장(章). 가벼운 드로잉 작업과 비슷한 느낌의 종이를 선택했다. /신신

책은 콘텐츠인 동시에 부피를 가진 물건이다. 그래서 좋은 책은 내용만큼 디자인과 제작도 중요하다. 신해옥은 “수상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연락한 사람이 인쇄소 사장님이었다”고 했다. “매년 독일이나 일본의 인쇄 박람회를 찾아다니며 최신 기술을 공부하는 분인데 그 나라에서 상을 받았다니까 너무나 감격하셨죠.”

신동혁은 “작가와 디자이너, 출판사, 제작자가 함께 만든 책”이라며 “하나만 어긋나도 수상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공모전을 주관하는 독일 북아트재단의 수상작 소개에도 엄유정과 신신, 미디어버스, 문성인쇄 이름이 명기돼 있다.

신해옥과 신동혁은 대학 디자인과 선후배로 만나 부부가 됐다. 지난해 지령(誌齡) 500호를 맞은 잡지 ‘디자인’의 전면 개편을 주도했고, 지금은 로고를 비롯한 세종문화회관의 새 아이덴티티(시각적 정체성)를 만들고 있다. 그래픽 분야 전반에서 활약하며 책을 꾸준히 만들었다. 특히 조각가 권오상, 디자이너 잭슨홍 등 예술가들의 작품집 성격 아트북을 많이 만들었다. 취향 확고한 마니아들이 찾는 책이다. 신동혁은 “FEUILLES도 1~3쇄를 모두 구입해 소장한 독자가 있을 정도”라고 했다.

독서 인구가 줄면서 책은 점점 고급화하고 화려해진다. 이들은 “대중서가 등장한 것은 불과 100년 남짓”이라며 “소수만이 책을 향유했던 시대로 되돌아가는 느낌도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호화판(豪華版)은 지양한다. “책은 때 타고 늙고 바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그게 걱정되는 책은 만들고 싶지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