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찾아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선경아파트는 현수막 수십 개로 뒤덮여 있었다. 입구부터 단지 안 가로수 사이, 관리사무실 외벽까지 ‘관리소장 물러나고 경비대장 돌아오라’ ‘철면피 소장’ 등 과격한 문구가 적힌 현수막으로 도배돼 있고, 곳곳엔 칼에 찢겨 널브러진 현수막들이 보였다.

서울 강남구 선경아파트 단지 내에 걸린 민주노총 산하 단체의 현수막. 아래엔 입주민들이 달았던 현수막이 칼에 찢겨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신지인 기자

30평형 한 채에 28억원씩 하는 강남 고급 아파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지난 3월 이 아파트에서 일하던 70대 미화원과 경비원이 각각 심장마비와 극단적 선택으로 잇따라 숨진 뒤였다. 아파트 관리소장에게 책임을 묻겠다며 경비원 일부가 민주노총에 가입한 뒤, 아파트 내부에서 시위를 벌였다. 또 이들은 민주노총 일반 노조 산하 단체 명의로 현수막 20여 개를 붙였다.

지난 13일에는 노조에 가입한 경비원과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 등 30여 명이 아파트와 1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한 시간 넘도록 확성기로 구호를 외쳤다. 지난 3월부터 이런 집회만 4차례 열었다. 주민 이모(80)씨는 “빨간 조끼를 입은 사람이 수십 명씩 줄지어 아파트 안에서 데모하니까 아이들이 무서워했다”며 “주민들이 ‘그만하라’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도 안 하고 마이크로 소리치곤 했다”고 했다. 다른 주민 박모(28)씨는 “경비원이 돌아가신 건 안타깝지만, 고인이 조합원도 아닌데 민주노총이 아파트로 몰려와 시위를 키우는 것 같아 불쾌하다”고 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측은 민주노총 측에 불법 현수막을 떼라는 공문을 다섯 차례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관할 구청에 철거해 달라고 신고도 했지만 “아파트 단지 내 현수막은 공공에 노출된 게 아니라서 아파트 내부 규약에 따라야 한다”는 답을 받았다. 일부 주민들도 이 시위와 현수막 설치를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 아파트 주민들과 관리사무소는 ‘민노총 세력들은 출입을 금지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 6개를 새로 만들었고, 일부 민노총 현수막이 보이지 않도록 덮어 걸기도 했다. 이후 누가 했는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주민들의 현수막 몇 개가 칼에 찢겨 바닥에 버려지기도 했다.

민노총 측은 최근 “우리가 설치한 현수막을 주민들이 훼손했다”며 아파트 관리사무소장 등을 재물 손괴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이른바 ‘현수막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법조계에선 법적 다툼으로 가면 주민들이 계속 피해를 볼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판수 AK법무법인 변호사는 “현수막을 설치할 때 관리실 허가를 받도록 하는 아파트 내부 규정이 있기 때문에 재물 손괴 혐의가 인정되기는 어려울 수 있다”면서도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현장을 보존하느라 현수막을 철거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민노총은 관리사무소의 경우 ‘관리’ 권한만 있을 뿐 철거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 소송으로 가면 무죄를 인정받기가 매우 까다롭다는 점을 미리 알고 주민들을 괴롭히기 위해 고소를 했을 것”이라고 했다.